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아 안나스와 가야바를 거쳐 빌라도에게 끌고 간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참 당혹스런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요18:28)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과 함께 하면 부정하게 되는 규례가 있었다.
부정하게 되면 막 닥 시작하는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나 죄인들의 상황과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만 중요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우상숭배와 음란 때문에 멀리 하라고 하신 말씀이
그들에게는 의식과 전통이 되어서 이방인들의 곤고한 마음을 살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은 우상과 정욕이 가득했지만 몸만 피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율법의 의미와 본질도 모른 채 형식적인 종교인으로 전락되어 있었다.
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체포하고 고발하면서도
유절절 규례는 지키고자하는 이기적이고 무지한 위선의 극치를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라고 빌라도에게 말했다.
그들은 이미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일을 꾸미는 판단자들이었다.
그들의 생각과 선입견과 고정관념과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판단한 것이다.
공정한 재판보다는 자신들이 이미 재판관이 되어 재판을 마친 것이다.
예수님은 이방인과 죄인들을 향해서도 판단하기 전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다.
사마리아 여인, 가나안 여인, 백부장, 병자들, 세리들, 고아와 과부 등
예수님은 더럽힘을 받지 않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더럽혀진 자들을 살리는 것이 목표였다.
예수님은 판단하실 수 있는 재판관이시지만 먼저 긍휼과 사랑으로 찾아가셨다.
나는 판단자인가, 아니면 판단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자인가?
어떤 잘못과 우매함에 빠진 사람이라도 비판하고 판단하기 전에,
먼저 긍휼한 마음으로 공감해주고 그 마음을 읽어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후에 성경적인 진리를 가지고 사랑으로 말해주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예수님, 제게도 사랑으로 말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