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하겠죠.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할 수 있나요, 아니면 너무 어려운 말씀인가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롬12:17~20)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눅6:27) ‘어떻게 원수를 사랑해?’ ‘상처를 주었으면 상처를 준만큼 갚아주어야지!’ ‘내 마음을 아프게 했으면 너도 아파야지!’ ‘나를 이렇게 골탕 먹였는데 어떻게 그 나쁜 놈을 사랑할 수 있어?’ ‘어떻게 원수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다고 물을 줄 수 있어?’이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렇다면 ‘원수’는 누구인가요? 부모나 형제를 죽인 자? 내 돈을 떼어먹고 도망간 자? 물론 원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원수는 평생 한두 명 있을까 말까합니다. 원수는 지금 나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나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하고 무슨 원수 맺은 것이 있나요? 북한의 김정은은 나쁜 녀석이긴 하지만요. 내 주변에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 중에 원수가 있습니다. 원수는 매일 만나든지, 자주 만나는 사람 중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와 관계가 나빠진 데는 원인이 있습니다. 그가 나를 힘들게 했거나 무시했거나 괴롭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내가 그에게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원인은 다양하지만 관계가 안 좋아지면 그 사람은 나의 원수가 됩니다. 심지어 부모 형제, 배우자, 친구나 지인, 성도도 원수가 될 수 있다는 말이죠. 원수가 되면 그를 미워하게 되고, 미워하게 되면 마음이 지옥이 됩니다. 현재 원수가 있는 상황이라면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물론 원수를 안 만드는 것이 최선입니다. 왜냐하면 원수가 된 사람과 다시 좋은 관계를 회복시키려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드는 힘과 에너지보다 열 배, 백 배 더 들 수 있습니다. 만약 원수가 되어서 법적인 소송까지 하면서 시간과 돈을 써야 한다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쓰는 시간과 돈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어떤 이유이든 원수가 되었다면 가능한 빨리 그 원수를 없애야 합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요? 원수가 같은 직장 안에 있다면 그가 회사를 나가도록 여러 방법과 조치를 취하면 될까요? 내가 원수가 없는 회사로 옮겨버리면 될까요? 물론 좋지 않은 방법이지만, 원수를 없애는 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수를 없앤 것이 아닙니다. 원수가 눈앞에서 사라졌는지는 몰라도 마음 안에는 여전히 원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원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원수를 없애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원수를 없애는 방법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나요?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것은 한 번 해보겠는데, 사랑하라고 하시니 너무 힘들까요? 우리를 옭아매고, 참기만 하고, 인내만 하라는 강요가 아닌가요?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면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라고 하시나요? 무조건 참고, 버티고, 인내하라고 하시면 내 감정, 형편, 처지, 이익도 살펴야 하지 않는가요?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핍박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원수를 갚으려면 복수할 궁리를 해야 합니다. 그 일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마음에는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의 몸은 더욱 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를 미워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붙잡고 비방해야 합니다. 자칫 원수를 비방하다가 여러 사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보아도 여전히 그 원수는 우리 곁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평생 가지고 살았던 한 남자 분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운영하던 이불 포목점을 말아 먹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집에 들어와서 담지 못할 욕과 폭력과 주사가 심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술을 먹고 들어와서 집에서 깽판을 부리니 어렸던 그는 징징거리면서 울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칼을 들고 그를 죽이겠다고 해서 일곱 살이었던 어린 그는 팬티만 입고 도망 나왔습니다. 이 분 기억에 너무 두렵고 무서웠으며, 동네 사람들한테 부끄럽고 창피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버지를 향한 미움과 증오와 분노를 품고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아버지가 원수였습니다. ‘왜 그렇게 무능했냐고, 그러려면 왜 나를 낳았냐고, 사랑은커녕 자녀들을 보호도 안 해주고, 무책임하게 그랬냐고?’ ‘싫은 아버지가 없어졌으면 좋겠어’라고 속에서는 분노로 가득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무서운 아버지에게 도전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성인이 되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요양원에 계시던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들었지만 그는 무덤덤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그는 미움과 증오를 지워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이 분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증오와 분노를 가지고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향해서 자신의 미움과 증오와 억울함과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한참을 쏟아내고 나니 아버지가 불쌍해지고, 못 배웠던 아버지가 측은해지고, 그렇게 해야만 했던 아버지가 가련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 아버지에 대해서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제대로 찾아뵙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을 때는 제대로 애도를 못해드려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향한 분노와 증오가 사라지고 연민과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생겨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바로 마음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고 축복하는 것이 쉽게 안 됩니다. 내 안에 쌓여있고, 막혀있고, 묶여있는 감정이 풀어져야 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내 안에 사랑을 부어달라고’ ‘왜 이렇게 나는 사랑이 부족하냐고’ 자책하거나 죄책감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신뢰할만한 사람 앞에서 풀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안전한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감정과 정서를 풀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풀어져야 우리의 막힌 감정이 풀어지며 우리의 인생이 풀립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우리는 관계를 풀어야 합니다. 묶여 있고, 닫혀 있는 관계를 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열쇠가 있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돌아가신 분과도 풀 수 있으며 지금 살아 있는 분과도 풀 수 있습니다. 그 사람과는 상관없이 내가 풀면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열쇠로 맺힌 것들을 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면서 원수를 없애며 살아갑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