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그런 일이 별로 없지만, 전에는 도로 위에 차를 세워놓고 사고의 시시비비를 가린다고 하면서 싸움이 벌어지는 일이 간혹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커야 이기는 게임이었습니다. 이제는 보험회사에서 원만하게 처리를 해주므로 전화만으로도 해결을 합니다. 이처럼 성격이 까칠해서 다른 사람에게 부드럽게 대하지 못하고 작은 일도 싸우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능력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사람 안에 상처가 있어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상처가 있으면 그것이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때로는 본인도 알지만 잘 하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을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성숙해야 하는 사람입니다.그렇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요?
야곱도 그랬습니다. 야곱은 다소 이상한 행동을 행합니다. 요셉이 데리고 온 손자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팔을 엇바꾸어 축복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창48:14) 인위적으로 야곱은 형과 동생의 순서를 결정했습니다. 물론 야곱의 축복은 그대로 이루어져서 에브라임이 형 므낫세보다 더 앞서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왜 그랬을까요? 어떤 성경학자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인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신탁이라고 하기는 야곱의 결정이 너무 인위적입니다. 하나님의 신탁이라고 할만한 어떤 단서나 근거가 없습니다. 첫째로 태어나지 못한 야곱은 형 에서에게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샀고 형에게 갈 축복 기도도 가로챘습니다. 그래서 도망자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야곱은 자신의 수완과 능력으로 살면서 너무나도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위해서 분명히 복과 은혜를 약속하셨지만 야곱이 스스로 어리석은 길을 선택해서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둘째였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둘째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우려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둘째였던 자신이 받았던 인생의 질곡과 상처에서 아직 깨끗하게 치유되지 못했다고 보면 너무 과장인가요?
그런데 야곱이 모르고 한 것이 아니라 알면서 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만류했지만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창49:19)하면서 알면서 자기 뜻대로 행했습니다. 하나님이 에서와 야곱에게는 태중에 있을 때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을 직접 말씀하셨지만, 이번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음에도 야곱이 자기 뜻대로 순서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야곱의 이런 행동을 요셉은 기뻐하지 않았고 다시 바꿀려고 했지만 야곱은 거부했습니다. 상처와 고집이 있는 행동은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합니다. 때로는 자기 중심적인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저건 왜 저래” “너무 건방져” “너무 예쁜척해, 잘 난 척해”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게 됩니다.
야곱처럼 우리도 그런 경우가 간혹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처, 연약함, 어리석음, 낙담, 두려움 때문에 생겨나는 일입니다. 성경에서는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다시 말해서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온전한 사람이며 장성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행동과 생각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생각과 행동이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2~14) 믿은 지 오래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여전히 어린 아이로 머물러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세워지고 섬겨주고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차이가 생긴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의의 말씀”을 경험했느냐 입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한다는 것은 지각을 사용하여서 하나님과 나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행하면서 세상에서의 연단이 있습니다. 그 연단을 잘 이겨낼 때에 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장성한 자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 연단과 시험과 유혹에 넘어지면 그는 여전히 어린아이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파도에 밀려 떠다니는 배처럼 왔다 갔다 하거나, 우리를 속이고 유혹하는 변화무쌍한 헛된 가르침에 넘어가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데려갈 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예수님에 관해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알았으면 해보면 됩니다. 하나씩 해보았으면 합니다. 하나님께 겸손하게 도움을 구하면서 행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힘주셔서 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새벽이나 아침기도회 혹은 말씀 묵상을 석 달 꾸준하게 해보세요. 운동이나 어떤 것이든 꾸준하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해보세요.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될 때까지 해보세요. 물론 이 땅에서는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나가는 기쁨과 행복으로도 충분하며, 장성한 자로 능력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