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에서 390여 명이 우리나라로 들어왔습니다. 아프간에 있었던 한국대사관, KOICA(한국국제협력단), 아프간 한국 병원, 직업훈련원 등에서 한국을 도왔던 아프간 사람들과 가족들입니다. 한국을 도왔다는 이유로 탈레반에게 큰 피해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영국, 호주, 프랑스 등도 자국을 도와서 일했던 아프간 사람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을 ‘특별 기여자’로 인정해서 그들의 요청을 우리나라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국제사회에서 호의를 베푸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책임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 우리가 어떤 도움이 필요할 때에 다른 나라의 도움과 협력을 기대하거나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도 6.25 전쟁 때 유엔 16개국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일사후퇴 때 흥남부두에서 미군 함정에 10만 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몸을 싣고 공산 치하를 벗어나서 피난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 나라들로부터 선교와 구호와 지원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나라가 설 수 있었습니다.
한국 땅을 밟은 아프간 사람들의 마음이 어떨까요? 고국을 떠난 안타까움과 불안과 초조한 마음이 가장 클 것입니다. 그래도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었다는 안심하는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호의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15:1~2)
초대 교회 당시 로마 교회에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거리낌 없이 먹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반면에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먹지 못하는 것 때문에 믿음이 없다고 무시를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스스로 믿음도 없는 초라함과 무능함에 자책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믿음이 없는 사람을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큰 냄비가 작은 냄비를 담듯이 진리는 지키면서 다른 점과 약한 점은 수용하고 인정하고 품으라는 말입니다. ‘그까짓 고기를 왜 못 먹느냐? 복음을 제대로 알아라’라고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럴 수 있지, 기다려줄께, 괜찮아’라고 배려해주라고 합니다.
왜 품어야 하는 것일까요? 나도 부족한데, 나도 살기 어려운데, 나도 가진 것이 없는데 왜 담당해야 하나요? 사실 우리는 부족함과 연약함과 두려움으로 힘들어 했던 존재입니다. 시기, 질투, 미움, 거짓, 탐욕, 불신 등의 죄악 때문에 얼마나 끔찍한 멸망에 처해지는지도 모르고 달려가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 호의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없었고 가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여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온 아프간 사람들은 그래도 한국을 도운 공로라도 있는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자기 유익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15:3)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은 찬양과 경배를 받으셔야 하는데 비방, 조롱, 핍박,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15:7)고 말씀합니다. ‘은혜’는 ‘선물’이란 개념입니다. 고대에는 ‘어떤 사람과 선물을 주고 받는 관계인가’는 자신의 명예와 가치를 드러내는 척도였습니다. 받을 만한 자격과 가치가 있는 사람과 선물을 주고받을 때에 자신의 명예가 높아지거나 유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는 선물이 ‘연약한 자들’ 곧 죄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만큼의 명예나 가치가 전혀 없는 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인 ‘예수’가 전해진 것입니다. 엄청난 사건이며 상상할 수 없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고의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최고의 가치로 여겨주셨습니다. 이런 엄청난 호의를 받은 우리가 누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닌가요?
교회는 누구든 받아들이는 곳이어야 합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예배를 많이 드리고, 헌금을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관계 속에서 우리의 고민이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 사람은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인가? 그가 나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인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즐거울까?’가 아니라 ‘그 사람을 어떻게 돕고 세워줄 수 있을까? 내가 그에게 어떤 유익이 될 수 있을까? 그곳에서 내가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질적인 것들은 반드시 지켜나가야 합니다.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서로를 존중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