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코로나에 걸리면서 몸이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40도까지 오르내리는 고열과 평생 겪어보지 못했던 인후통을 경험했습니다. 생활치료센터에서 8일간 불편한 격리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몸이 힘든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교회에 대한 염려와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몇 일간 새벽기도회를 영상으로만 드려야했습니다. 현장에서 드리는 새벽기도회가 잘 회복되고 있었는데 영상예배로 드려야 하는 안타까움과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주일예배는 어떻게 해야 하나?’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결국은 외부 목사님에게 부탁했고 영상예배로 송출해야 했습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막막함과 답답함과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어쩌다 목사가 코로나에 걸렸나?’하는 비난의 소리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염려, 걱정, 안타까움, 후회, 우려, 미안, 죄송함이 교차하면서 몸보다는 마음이 더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삼일이 지나면서 걱정과 우려가 하나님의 역사로 바뀌어졌습니다. 지방에서 세미나 중이던 한 목사님이 그 교회의 성도를 통해서 당신이 먹던 가래 기침약을 보내왔다. 약을 덜 가져왔다고 하면서 두 번이나 집 앞에 와서 약을 놓고 가셨고 딸기까지 사서 놓고 가셨다. 순장님들과 성도님들의 문자, 카톡으로 격려와 위로를 보내주셨습니다. 내가 불편할까봐 배려해서 일부러 문자를 보내지 않고 기도만 하셨다는 분들의 마음도 익히 압니다. 한 집사님은 문자로 격려와 위로를 보내시고, 그것으로는 안 되겠는지 전화를 하셨습니다. 당신의 후배가 우리나라 최고 대학에서 박사를 한 전문의이니 치료가 필요하면 말씀하시라고 그러셨습니다. 필요한 것 말씀만 하시면 병원으로 가져가겠노라고 하셨습니다. 평상시 같았으면 너무 과하고 생뚱맞게 들리던 말들도 정겹고 고맙게 들려왔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사랑과 관심과 기도에 너무 감사했습니다. 눈물이 핑 돌고 생각지도 못한 과분할 정도의 사랑으로 가슴이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코로나 사흘째 정도 되었을 때, 생활치료센터에서 도시락을 먹는데 이상했습니다. 입맛이 없어서 아무 생각 없이 먹어왔었는데, 몸이 많이 회복되니 생각을 하면서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김치를 먹는데 아무 맛도 없었습니다. 점심 도시락에 나왔던 불고기, 무생채, 오이무침 맛을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아무 맛도 안 났습니다. 미각을 잃어버렸습니다. 냄새도 안 납니다. 아~ 코로나에 걸리면 미각과 후각이 사라진다던데 정말이었습니다. 맛도 느끼지 못하면서 밥을 먹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내가 맛도 없는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맛도 없고 재미도 없는 삶을 살지는 않았을까? 사람 사는 맛을 알고 살아왔나? 아내가 나한테 가끔 ‘자기는 재미없어!’라고 그랬는데. 그럼 맛있는 인생은 뭘까? 함께하고, 이야기하고, 표현하고, 들어주고, 소리 질러주고,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 확진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겪으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따듯한 정과 관심과 사랑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맛’이었습니다. 미각을 잃으니 삶의 미각을 더 느끼게 된 것 같았습니다. 나는 삶의 맛을 안다고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목회도 나름대로 정성과 사랑을 쏟으면서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때로는 안수 기도 해드리고, 심방과 문자와 전화로 성도들의 간절함과 필요를 채워주고 돕긴 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 중심적이며 이지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정적으로 느끼지 않고, 공감하지 못하고, 머리로만 생각하는 이지적인 인간으로 살아오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성숙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목회자 가정에서 자라다보니, 감정으로 느끼면 너무 많은 슬픔, 아픔, 고통, 설움, 비참함을 느껴야 했기에 이지화로 방어해온 것 같았습니다. 별로 감동도 없고, 기쁨도 없고, 감격도 없는 그런 인생으로 일부러 살아온 것 같았습니다. 사실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두근거림, 초조함, 흥분, 기쁨, 감동을 누구 못지않게 느끼는 보통 인간입니다. 이제는 미각을 찾아서 인생의 맛을 느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가 나에게 깊은 묵상, 기도, 감동과 은혜를 경험하게 해주었습니다. 시련을 당하였지만 몇 배나 더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낸다는 말씀이 딱 맞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를 통해서 역사를 하셨습니다. 확진되기 바로 전 주일 설교에 ‘우리는 예수님의 몸입니다’라는 설교를 했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한 사람 한 사람 성도가 모여서 이루어집니다. 머리는 예수님, 몸은 교회 공동체, 지체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의 하나하나의 지체입니다. 몸과 지체는 결코 나눌 수 없는 생명의 관계 안에 있습니다. 각 부분끼리, 그리고 부분과 전체 사이에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전체로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유기적 생명체입니다.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그렇고, 우리와 서로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눈과 귀는 서로 돕고 있습니다. 입과 코와 손과 발도 서로 도우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김 집사님과 이 권사님은 서로 돕고 있습니다. 박 권사님과 이 집사님은 도우면서 존재합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 너는 나를 위해서 존재 한다” “나는 너를 돕기 위해 살고 있고, 너는 나를 돕기 위해 살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관계입니다. 손가락이 아프고, 코가 아프면 어떤가요? 손가락만 아픈 것이 아니고, 코만 아픈 것이 아니고 몸이 아픕니다. 이 권사님이 아프면 우리가 함께 아픈 것입니다. 김 집사님이 기쁘면 우리가 함께 기쁜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울고 함께 우는 가족 공동체입니다.....’라고 설교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하고 그 다음날부터 내가 아팠습니다. 내가 아프니까 순장님들, 성도님들이 아파했습니다. 내가 아프니까 우리가 서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나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이며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실감나게 체험하도록 하셨습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6~27)
우리는 예수님이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가족이 서로 하나 되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주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고전13:3)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나 성공이나 인기가 아닌 사랑입니다. 우리는 일이 많아지면 관계에 들이는 시간, 에너지, 관심을 줄이고 일을 더 하려고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시간과 관심을 들이는 것이며,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엡5:2) 우리가 좋아하는 것, 안락함, 목표, 돈, 에너지 또는 시간 등을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양보하고 포기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는 최고 좋은 방법입니다. 믿는 우리끼리 싸우고, 욕하고, 교회가 전쟁터가 되면 전도가 막혀 버립니다. 전도와 봉사, 구제와 선한 일을 많이 해도 서로 싸우면 세상 사람들은 조롱합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 때문에 힘들다고 합니다. 그 사람 보기 싫어서 떠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서는 사랑을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를 짜증나게 하고, 힘들게 하고, 당황하게 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럼 어디가면 없을까요? 죽으면 없습니다. 그것이 싫어서 사람을 안 만나고, 특히 꼴도 보기 싫은 사람 때문에 교회 안 오면 어떨까요? 교제가 없으면 마음의 상처는 없을지는 몰라도, 성장이 멈춥니다. 성장하지 않고 멈추면 그냥 그 상태가 아니라, 영혼이 병들어 버립니다. 만약 부모가 아이가 아파서 성장하지 못하는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요? 하나님도 우리가 성장하지 않는 모습을 보시면 아파하십니다.
사랑하기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일까요? 바로 오늘 지금입니다. 상황은 변하고, 사람은 죽고 떠납니다. 사실 만날 날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기 전에 무엇 때문에 아쉬움을 가질까요? “돈을 더 많이 벌었어야” “공부를 더 했어야 하는데” “권력과 인기를 가졌어야” “더 예쁜 여자, 더 멋진 남자를 만났어야 하는데”라고 하나요? 아닙니다. “더 사랑했어야 하는데”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라는 말을 하지 못했던 것에 아쉬움을 갖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예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순모임에서 함께 울고 함께 웃습니다. 순모임에 하지 못한 분들은 조금씩 순모임에 들어가셔서 교제의 맛을 느끼시면 좋습니다. 예배에 나와서, 소모임에 가서, 순모임에 가서, 남성도회 여성도회에서, 청년대학부에서, 중고등부에서 영적 가족 공동체를 경험하고 느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예수 공동체입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