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은혜가 필요한 요나다
교회에서 매주 화요일마다 책 나눔의 시간을 가졌다. 코로나로 인해 모든 성경 공부와 순모임이 사라져버렸으니 소모임으로 모처럼 모여 나눔의 시간을 가진 것은 마치 가뭄의 단비와도 같이 즐거웠다. 책의 내용 또한 매주 기다려질 만큼 새로웠으며 깊이가 있었다. 아껴서 두고두고 읽고, 되새김하고 싶을 만큼 훌륭했다. 또 조심스러웠지만 사람과 사람을 대면하여 만나고 교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정말 감사한 시간이었다.
‘방탕한 선지자’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익히 아는 요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저자(팀 켈러)는 우리가 미처 다 알지 못했던 요나를 보게 한다. 익히 아는 우화와 같은 요나의 ‘물고기 뱃속 사건’ 이면에도 어떤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는지 세세하게 깨우쳐준다.
이미 안다는 선입견으로 스토리를 따라 구태의연하게 읽던 요나의 이야기에는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신학적 의미들이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깊고 넓은 은혜의 섭리가 어떻게 택하신 사람들에게 구현되는지를 발견하게 한다. 요나와 그외 등장인물들을 통해 현재 지금의 나에게 충분히 적용 가능하도록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임을 선포하신다.
책모임이 있던 6주 동안, 요나가 살았던 시대 속으로, 그의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을 하였다. 요나의 시대는 당시 큰 세력을 떨치고 있던 앗수르 제국과 수도인 니느웨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 앗수르는 요나의 생애 내내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위협하던 매우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테러 국가’였다.
이 시대 상황을 알아야 요나의 불순종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가 가능해진다. 요나는 매우 민족적주의적인 성향의 사람이었다. 조국 이스라엘의 대한 그의 마음은 적대 국가였던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 ‘가서 전하라’ 에 대해 전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가 보는 니느웨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사라져야 마땅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선하신 하나님은 어찌 앗수르와 같은 민족에게 자비를 베푸시려 하는가? 왜 자기 백성의 원수들을 도우시려 하는가? 요나는 분노하고 절망했으며 하나님의 정의와 지혜조차 의심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저자는 요나에게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진짜 하나님'이 나타났다고 표현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실재하시는 하나님과의 다른-에 대한 생각들, 인식의 틀이 존재한다. 물론 점차 성장하며 변화되어지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다.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더라도 말씀에 의지해 무조건 떠나는 믿음일지, 아니면 요나처럼 ‘하나님은 나보다 뭘 모르신다. 그러니 내가 결정해야겠다.’라는 불신이든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할 때, 그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믿음이 부재할 때, 누구든 요나와 같이 행동하고야만다.
#시련의 배후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
요나가 불순종을 택하였을 때 하나님은 폭풍을 보내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어려운 일(폭풍)은 특정한 죄의 결과물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모든 죄에는 분명히 어려움이 초래함을 성경을 들어 강조한다. 요나는 자신의 불순종의 결과로 폭풍이 임하였음을 알았다. 감사하게도 모든 폭풍 속에는 연약한 자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담겨 있다. 단지 요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통해 그가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시는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보다 더 큰 우상을 다루신다
하나님이 요나를 폭풍 속으로 내던지신 것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그릇된 정체성을 돌아보도록 하기 위함이셨다. 요나의 자아상엔 신앙보다도 민족이 더 우위에 존재하였다. 민족에 대한 충성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이 충돌했을 때 그는 자신의 민족의 편을 선택했다. 하나님은 요나처럼 자기 정체성의 뿌리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닌 세상의 힘, 인정, 위안, 안정에 둘 때 이것이 우상이 됨을 아셨고 요나의 이 부분이 변화되시길 원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부분을 다루시는 과정은 마치 아비가 자녀를 양육하심같이 세심하시고 온유하시다.
#요나보다 더 큰 이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에서 ‘요나의 표적’에 대해 말씀하시고 자신을 ‘요나보다 더 큰 이’라고 하셨다. 이 부분을 저자는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건 요나가 뱃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구하기 위해 죽으실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물론 요나는 죽을 뻔했을 뿐이지만, 예수님은 실제 죽으셨다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요나는 그리스도는 아니지만, 예수님을 나타내는 모형 중 하나였던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 이 표현의 의미를 궁금해했다. 드디어 예수의 죽으심의 또다른 변주로 요나의 '물고기 사건'이 있었으며 요나의 불완전한 자기 희생과는 다른 온전한 그리스도의 헌신에 탄복할 수 밖에 없었다.
#완전한 포용으로 ‘샬롬’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과분한 자비에 온전히 기대어 사는 존재함을 알고 다른 모든 사람을, 심지어 원수로 여겨지는 이들까지도 너그럽게 용서하고 환영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민족,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하여 그들을 너그럽고 정의롭게 대하길 원하신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도 저주하거나 함부로 대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약 3:9)
#하나님의 급진적인 은혜만이 문제를 해결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면 우리의 짐은 벗겨진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든, 하나님은 그 분의 은혜로 문제를 해결하신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복과 정체성은 그의 변함없는 사랑에서 기인한다. 놀랍게도 복음이 주시는 자존감은 성취한 것이 아니라 거져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새로운 정체성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은혜의 선물 앞에 누구도 우월감을 느낄 수 없다.
요나서의 결말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온유하신 하나님께서 고집불통의 편협한 선지자를 다루시는 방식을 볼 때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을 것이 확실하다. 그는 하나님의 급진적인 사랑앞에 결국 굴복 당했을 것이다.
결론에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은혜의 복음이 요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누구라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번의 은혜로 완벽하게 변화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한다. 우리는 평생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의 진리에 거듭거듭 노출되어 배워야야하는 연약한자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더 가치있는 존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아직도 상황파악을 못한것이다." 라는 저자의 말처럼 구원은 오로지 주님께만 속한 일이다. 우리에게서 일부 나오는 것이 분명히 아니다.
'방탕한 선지자’는 요나의 불순종으로 시작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저자는불순종의 대명사 ‘요나’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읽게 했다. 이제 요나서의 열린 결말을 주목한다. 누구든 하나님의 은혜 아래 그의 부르심을 듣고 어떤 삶으로든 응답해야한다.
이제 나의 이야기를 써 볼 차례다.
샬롬! 방탕한 선지자 책나눔을 하는 동안 참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