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보이지 않는 진리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한계가 있는 존재이므로 그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마치 땅에서 열심히 기어 다니는 개미가 사람과 사람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너무나도 상투적이고 평범한 ‘하루살이와 메뚜기와 개구리’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살이가 메뚜기하고 아침부터 놀다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하루살이야, 벌써 저녁이 되었으니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살이가 메뚜기에게 물었습니다. “내일이 뭔데?”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기 때문에 ‘내일’을 모릅니다. 하루살이가 죽고 나니 메뚜기는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만난 것이 개구리였습니다. 개구리와 놀다가 가을이 왔습니다. 그러자 개구리가 “메뚜기야, 겨울 지나고 내년에 만나서 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메뚜기가 개구리에게 “내년이 뭐야?”라고 물었습니다. 메뚜기는 ‘내년’을 모릅니다. 1년만 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과 영생과 하나님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기가 있고,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바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주에 셀 수 없고 볼 수 없는 별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특히나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예수의 탄생, 즉 강림입니다. 신이라고 하는 예수가 어떻게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왔는지, 어떻게 처녀의 몸에 잉태되었는지 도저히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였던 시대에 하나님은 계명을 주기 위해서 이 땅에 강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강림을 맞이할 수 있도록 백성들에게 정결을 많이 준비를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강림에 백성은 정결하게 준비해야 했고 그렇지 못하면 죽음을 당했습니다. 많은 준비를 했어도 하나님의 강림을 사람은 직접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강림하실 때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려왔습니다. 진중에 있던 모든 백성이 그 광경과 소리에 다 벌벌 떨었습니다. 누구라도 하나님의 강림을 보겠다고 산에 올라갔다가는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던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죄 때문입니다. 더러운 죄를 가지고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철저한 준비를 했지만, 2천 년 전에 하나님이 강림하실 때는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강림을 맞이할 어떤 준비도 없었지만 하나님은 강림하셨습니다. 죄인에게, 맞이할 자격도 없는 자에게, 거들떠보지 않아도 뭐라 할 수 없는 자에게 강림하셨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감히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차원을 초월하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전능자이시며, 어디에도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제한하셨고, 속박하셨고, 철저하게 낮추셨고, 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놀라운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너무 황당해서? 말도 안 돼서? 너무나도 커서? 너무 비이성적이어서? 머리로 이해할 수 없어서? 맞습니다. 예수님의 강림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거나, 과학적으로 증명되거나,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하루살이가 내일을 이해할 수 없고, 메뚜기가 내년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루살이가 이해할 수준이 안 돼서 내일은 없다고 말해도 내일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메뚜기의 한계 때문에 내년이 없다고 말해도 내년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같은 영적인 세계에 대한 사람의 이해력이 한계가 있어서 이해할 수 없지만 엄연히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으로 강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강림을 권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강림하셨듯이 우리도 강림해야 합니다. 목회자로서는 설교의 강림이 있어야 합니다. 허공을 치는, 신학적인 용어가 난무하는, 사변적인 설교보다는, 하루살이과 메뚜기와 개구리의 이야기처럼 쉬우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설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그 당시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을 많이 하셨고, 그래서 깊이 깨닫고 오래 기억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제자훈련과 설교에 탁월했던 고 옥한흠 목사님은 “귀에 들리는 설교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목사님이 안식년에 작은 교회들을 다니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왜 이런 교회들이 성장을 못하는 것일까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깨달은 것은 목회자인 자신에게는 그 설교들이 은혜로웠지만 일반 성도들에게는 너무 어려워서 와 닿지 않고, 삶하고는 괴리된 설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강림해야 합니다. 옛날에 내가 이랬고 저랬고, 이것을 해야 성공하고 돈 잘 벌고, 보릿고개가 어떻고, 6.25가 어땠고 하는 것은 강림이 아니라 부모 수준으로 자녀를 끌어올리려는 것입니다. 자녀의 눈높이에 맞추어야 합니다. 사장님들은 직원에게 강림해야 합니다. 빨리 퇴근하고 싶은 것이 직원의 마음이며 월급과 보너스 더 받고 싶은 것이 직원의 마음일 수 있습니다.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과 눈치를 봐야 하고, 고과 점수나 승진 시험에 대한 걱정과 장래에 대한 염려를 하는 것이 직원입니다. 그 직원의 눈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구유에 나셨듯이, 가난하고 궁핍한 자에게 내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제사나 번제가 아니라 인애라고 하셨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아프고 상처받은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내가 거리에서 만난 폐지를 줍던 할아버지로 오셨을 수도 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야채를 늘어놓고 떨이로 팔던 할머니로 오셨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거리에 버려진 어린 아이로 오셨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낮아질 때에 성탄절은 더욱 따듯해 집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