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요한복음 17장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1~3) 예수께서 만물을 다스리는 영광과 권세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기도 내용입니다. 그 외에도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요17:10) “태초에 말씀(예수)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2:6)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를 동등한 분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과 하나님의 성령이 동일하시며 혹은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으로 성도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로 계신다는 말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그 본질과 능력과 영광이 동등하십니다.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같기에 아버지를 정확하게 고스란히 계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아버지의 치유의 능력과 생명을 주는 능력을 그대로 계시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온전히 계시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본질적 또는 존재론적으로 같을 뿐 아니라, 의지에 있어서도 아버지와 같아야 합니다. 그 의지에 있어서 같다는 것을, 아들이 자신의 의지를 아버지의 의지에 완전히 일치시키는 것으로 표현하기 위해 순종의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또 전능자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데, 그리스도가 하나님보다 조금 모자라다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모자란 분이 어떻게 우리를 모자람과 결핍에서 구원하여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시켜서 구원과 계시의 문제에 오류를 범하는 것은 치명적인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히 같으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완전히 계시하고 우리를 위한 그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었습니다. 이 역사적이며 실제적인 구원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효력을 발생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를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게 하고 그 구원이 실제로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분입니다. 성령은 예수께서 아버지께 요청해서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보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이 성령을 보내심에 함께 작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삼위일체는 신비한 구조입니다. 삼위일체는 셋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에 관한 숫자놀음이 결코 아닙니다. 삼위일체라는 신비를 물이 액체, 얼음, 수증기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혹은 한 남성을 말할 때에 아들이면서 남편이면서 아버지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로 계십니다. 삼위 하나님은 본질과 능력과 영광이 동등하십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초월자이시면서 내재하시는 분이므로 우리에게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초월자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와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에서 초월자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와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이 계시의 체험들을 적어 놓은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관한 신약성경의 말씀들입니다.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이런 성경의 기록들을 정리해보면 삼위일체 신론이 이루어집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한 분 하나님, 그 초월자가 초월을 유지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여 스스로를 계시하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그의 영을 통하여 이 세상에 계시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와 구원이 효력을 발생하게 하십니다. 우리 인간의 제한된 인식 능력과 언어로는 더 이상 깨닫거나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와 사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함께 일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황송한 일입니까!
A.W. 토저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빛 가운데서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선조의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풍부하고 음악적인지요!/ 그런데도 주의 기이함을 말하려고 하면/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초라해 보이고/ 우리의 언변이 얼마나 조잡해 보이는지 모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외로운 신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손으로 입을 막습니다./ 저 불타오르는 덤불 앞에서 우리가 구하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 곧 삼위일체 한 하나님을 합당하게/ 경배하는 것뿐입니다. 아멘”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하신 기도 중에서 이런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 되기를 간구하셨습니다. 그 분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최종 목적지이며, 바라는 소망의 모습이 우리의 하나됨입니다. 우리가 후에 예수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하나인 것 같이 우리도 완벽하게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자녀들이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한 가족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아직 불완전하지만 하나가 되었습니다.
12세기에 성 빅토르의 리샤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삼위일체를 쉽고 단순하게 논증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완전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도 완전하다. 그런데 사랑은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사랑하거나 사랑받는 사람이 완전하지 못하면 그 사랑도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완전한 사랑은 완전한 두 인격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사랑에서는 기쁨이 솟아난다. 하지만 사랑의 기쁨을 둘이서만 향유한다면 그들은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완벽한 사랑은 사랑으로 샘솟는 둘의 관계를 넘어서서 다른 존재와 나누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흘러넘치는 사랑을 받고, 그 기쁨을 풍성하게 만들어줄 세 번째 완전한 인격적인 존재가 있어야 완벽한 사랑이 성립될 수 있다. 그러므로 완전한 사랑은 논리적으로 완전한 신적 존재 셋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와 ‘너(배우자, 형제, 성도 등)’의 거룩한 삼각관계에서도 적용되어집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사랑의 관계가 은혜로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은 멈추지 않고 너에게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주고받는 것이 이루어져야 온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고, 하나님과 하나가 된 우리가 서로에게 사랑을 흘려보내는 삼위일체적인 사랑을 할 때에 가장 완전한 사랑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완벽한 사랑을 이룬 것처럼, 우리도 완벽한 사랑을 이룰 존재입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