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자녀를 향한 부모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엄마가 이제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아이에게 과일칼을 들려주나요? 아빠들이 초등학교 아이에게 운전대를 맡기나요? 아닙니다. 왜죠? 부모의 가장 지대한 관심은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건강하게 양육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자녀들 사이의 약속을 칠판에 써놓는 가정이 많이 있습니다. 엄마에게 버릇없이 말 안하기, 집에 들어오면 손부터 씻기, 게임은 하루에 1시간만 하기, 텔레비전은 1시간만 보기, 동생 때리지 않기 등 물론 자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왜 이런 규칙을 정해놓고 힘들게 하느냐고 불만 불평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 맘대로 하고 싶다” “내 인생은 내꺼야”라고 항변합니다. 규칙을 왜 만듭니까? 자녀 잘 되라고, 자녀를 위험, 거짓, 죄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한 것이며, 가정 공동체를 위해서 입니다.
사회 법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공질서 유지를 위해서, 공정한 사회를 위해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왜 주셨을까? 십계명 이외로 여러가지 율법을 왜 주셨을까? 족쇠를 채우고, 속박하고,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서 인가요?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2~13) 이스라엘의 행복을 위하여, 즉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주신 율법입니다. 자녀들이 부모가 정해놓은 규칙을 잘못 해석하면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규칙이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구약의 율법을 해석할 때에도 그 이면에 담겨진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을 위하여, 특히 약자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많습니다. 절기법에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레위인과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약하고 소외되기 쉬운 이들과 함께 하라는 의도로 주신 율법입니다. 사람에게 맡겨놓으면 힘 있고, 돈 있는 자가 횡포를 부리기 때문에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물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그러나 법이 없으면 자칫 자신만을 위해서 이익을 채우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이익을 위해 법이나 규제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기적인 개인이나 기업이나 이익단체는 로비를 통해서 자기들의 유익한 쪽으로 법을 좌지우지하려고 합니다. 법 망을 피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율법을 잘 살펴보면, 사람을 위한 것이며 약자를 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포로된 여인을 아내로 취하기 위해서는 절차와 과정을 거쳐야 하는 법이 나옵니다. 전쟁에서 사로잡은 여자가 마음에 들게 되면, 포로로 잡은 여인을 함부로 대할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힘없는 여인의 권리와 감정과 인격은 완전히 무시당할 수 있었습니다. 함부로 노예나 첩이나 노리갯감으로 삼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불과 몇 십 년 전에 일본군에게 어린 소녀들이 위안부로 내몰리는 처참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물며 몇 천 년 전 고대사회는 얼마나 더 했을까요? 힘이 있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시대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약자를 보호하셔야 했습니다. 포로된 여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폭력으로 몸과 마음을 유린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적어도 절차와 과정을 밟게 했습니다. 여인은 머리를 밀고 손톱을 베고 한 달 동안 자신의 부모를 위해서 애곡할 수 있게 했습니다. 여자에게서 꾸밈과 매력을 제거했습니다. 탐욕스런 마음으로 단지 미모 때문에 여자를 취하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남자도 진정으로 그 여인을 원하는 것인지 확인하고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혼 했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돈을 받고 팔아서는 안 됩니다. 부득이 이혼해야 한다면, 그 여인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어야 했습니다. 이 율법은 그 당시의 인권 유린에 대한 매우 파격적인 보호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해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법이란 원칙적인 보호 장치입니다. 하나님은 법 이상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19:4)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32:10~12)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도 사람을 보호하시고, 약자를 살펴주셨습니다. 그러나 법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법을 미꾸라지처럼 교묘하게 비켜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법을 악용하기도 합니다. 사람을 위하지 않고 법을 위한 법을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율법으로는 완벽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그 시대적 상황에서 인간의 죄성을 자제하도록 하시고 보호하시는 장치였습니다.
율법으로는 보호의 한계가 있습니다. 마지못해서, 억지로, 지켜야 하니까 할 수 없이 율법을 지켰습니다. 물론 지키지 못할 때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수동적인 방법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기쁨으로, 감사하면서 살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오 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 리를 가주는 것이 가능합니까? 한쪽 뺨을 치는 자에게 다른 쪽 뺨을 돌려대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까지 줄 수 있습니까? 저주하는 자를 축복할 수 있습니까?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할 수 없는 우리에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짜 사랑을 베푸셨고 보여주셨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습니다. 즉, 수 백 억을 빚졌지만 전부 다 탕감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건져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가 사단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사람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존재 자체를 존귀하고 보배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한 사랑을 받았습니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습니까?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싶지 않습니까? 나를 화나게 하고, 상처 주는 그에게 앙갚음 하고 싶은 것보다 그가 안타깝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아내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남편이 귀하게 여겨기지 않습니까? 세상 만물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나를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으라는 말씀은 나를 보호하려고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율법은 나를 행복하게 하시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랑입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