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이나 사건을 인식해서 논리나 기준을 가지고 판정하는 것을 판단이라고 합니다. 판단은 개인과 가정, 경영, 목회,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데 필요한 은사입니다. 그래서 판단과 분별을 잘 해야 하지만, 자칫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비난은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하는 것입니다. 정죄는 죄인으로 규정하여 죄가 있다고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며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재판관은 판단해서 죄를 범한 사람에게 징역형, 벌금형 등을 매깁니다. 일반 시민이 다른 누구를 정죄해서 벌금을 매기거나 징역을 선고할 수는 없는거죠.
성경에서 판단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준엄한 심판을 지칭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2:1)는 말씀이 있습니다. 판단의 기준은 철저히 하나님의 의로움과 말씀입니다. ‘판단’은 헬라어로는 ‘크리노’입니다. ‘정죄’는 ‘카타크리노’입니다. 크리노 앞에 '…에 따라서'라는 의미의 전치사 ‘카타’가 붙습니다. 누군가를 크리노(판단)하면 그 판단이 내게로 다시 돌아와서 자신을 카타크리노(정죄)하게 된다는 의미죠.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은 자신에 대한 정죄가 되어 버립니다. 물론 ‘판단하지 말라’가 판단 기능을 중지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한 책망을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입장에 서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중요하게는 여겼지만 잘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받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존재임을 자각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부심과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자칫 우리가 오히려 위선자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았고, 선교하고, 구제하고, 봉사하니까~’라고 하면서 누구보다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랑하거나, 자기만족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진실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찰스 시몬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주목해서 보기를 원했던 것은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나 자신의 불결함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다. 나는 항상 이 두 가지를 같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2:16)는 말씀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재판관입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예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예수의 의로운 옷을 입혀주십니다. 죄를 덮어주십니다. 죄가 없어지거나, 죄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려지는 것이죠.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다른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우리도 본질 상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예수의 은혜로 덮여진 것이지 우리의 공로와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과 정죄가 아니라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 성도들이 다 예쁘게 보입니다. 성도들이 다 예수의 옷을 입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성도에게 덮여진 예수의 옷이 가끔 세상의 바람에 날려 들쳐져서 약함과 부족함이 드러나지만, 그래도 예수의 옷을 입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보이는데 어떡합니까(내가 콩깍지가 씌워진 것인가요)? 어떤 분은 ‘목사님! 예배에 늦게 오면 문 닫아버려서 정신 바짝 차리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었는데요, 예배시간에 졸고, 늦었고, 오기 싫었고, 도망치기도 했는데요. 그때 나를 기다려주고 기도해준 분들이 계셨습니다. 나를 누가 정죄하고 비난했더라면 목사의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만약 나의 과거의 죄를 다 드러내고 끄집어내면,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강단에서 설교할 설 수 없습니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사라져야 마땅합니다.
교회는 비판, 비난, 정죄하는 곳이 되어선 안 됩니다. 교회는 용서, 용납,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어머니 품 속 같은 곳이어야 합니다. 실수해도, 실패해도, 죄를 지었어도 달려가서 안길 수 있는 곳이 어머니 품속입니다. 어머니가 책망하며 회초리를 들더라도, 함께 울면서 안아주며 품어주시는 것처럼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비난과 비판이 결코 사람을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이 사람을 바꿉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바뀐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