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율법이 있으므로 자신들은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유대인들만의 신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던 것이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의지하며, 잘못된 선민사상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맹인의 인도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라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율법에서 지식과 진리를 터득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착각과 오해에 완전히 빠져 구제 불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롬2:21~23)하면서 그들의 위선과 거짓을 책망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을 오늘날은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인은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실제 하나님을 모르므로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 가는 길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 장로, 선교사,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이 종교인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우리가 종교인이 된다면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부이며 최고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돈과 인기와 일과 성공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세상 사람들은 ‘저렇게 믿으려면 힘과 돈을 믿는 것이 낫겠다’하면서 하나님께 오는 길이 막혀집니다. 종교적인 열심, 율법주의, 완벽주의,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종교인을 보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려면 저렇게 살아야 하는가 보다’하며 지래 겁을 먹을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열심은 있는데 상식과 예의도 없고 성실, 정직, 배려, 인내, 사랑도 없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는다고 별 것 없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할례 이야기를 꺼냅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바울은 할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그것은 무할례와 같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면, 그것은 할례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몸에만 할례한 것이 진정한 할례가 아니며, 무늬만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라는 말합니다.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마음에 할례한 자가 진정한 유대인이라고 말합니다. 할례 받은 유대인이라고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할례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 그렇다면 어떻게 할례를 마음에 할 수 있는 것일까요?
할례는 남자 생식기의 포피를 잘라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법을 따르겠다는 언약의 표식입니다. 그것은 언약을 깨뜨리는 것에 대한 처벌을 보여 주는 표시입니다. 고대에는 계약을 맺을 때에 서명 대신 의식을 행했습니다. 동물을 반으로 가르고 그 사이로 지나가면서 ‘만약 내가 이 언약을 어기면 이 동물처럼 쪼개져 죽어도 마땅하다’고 고백했습니다. 할례의 의미는 '언약을 깨뜨릴 경우 포피가 끊어진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이죠. 그런데 유대인 중에서 누구도 언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단절되고 끊어져야 했습니다.
할례를 마음에 한다는 것은 ‘마음 속 깊이 진심으로’를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마음의 할례는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합니다. ‘영에 있고’는 ‘by the Spirit’입니다. 즉 할례는 성령에 의해서 마음에 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6~27)
할례는 잘라내는 것인데요, 사실 ‘단절’ ‘끊어짐’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 그분으로부터 단절되었습니다. 그분은 율법을 지키지 않은 자들이 받아 마땅한 저주를 대신 받으며 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을 믿을 때에, 성령께서 마음에 할례를 하십니다. 할례는 겉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우리에게 예수님의 옷을 입히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의 대상이 아닌 칭찬의 대상으로 인정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그분의 자녀이며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