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맹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볼 수 없어서 불편함이 있었겠지만 그 불편함도 모르면서 컸을지 모릅니다. 볼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무엇이 좋은 것인지,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 몰랐습니다. 자신의 얼굴도 부모의 얼굴도 몰랐습니다. 그는 부모에게 버림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부모가 가난해서 치료는커녕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천민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거리에서 동냥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늘 동냥하는 그 장소에 누군가 데려다 놓거나, 아니면 혼자서 지팡이를 의지하고 와서는 구걸하는 소리를 내는 것뿐이었습니다. ‘한 푼만 주세요, 이 가련한 눈먼 놈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오늘 먹을 한 푼만 요’ 우는체하면서 아니면 정말 울면서, 불쌍한 목소리로, 아니면 정말 불쌍한 모습으로 매일매일 그 자리에서 동냥을 했습니다. 거지라는 이유로 그는 어릴 때부터 듣기에도 힘겨운 놀림과 조롱과 멸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비가와도, 바람이 불고 날이 추워도, 뜨거운 한 낮에도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가 가본 곳이라고는 구걸하는 그 곳 뿐이고, 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이름도 모르는 한 거지일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과 그 거지 맹인이 구걸하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역시 제자들도 그를 보자마자 서로 수근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죄였습니다. ‘저 사람이 죄를 크게 지었을 거야’ ‘무슨 죄를 지었을까? 도둑질, 거짓말, 간음, 아니면 제사장을 모독했을까?’ 또 다른 제자가 말을 잇습니다. ‘아냐 어렸을 때부터 소경이었던 것 같아!’ ‘저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을 거야’ 제자들이 이렇게 갑론을박하면서 그 소경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소경을 넌지시 바라보고 계셨지만 조롱과 멸시의 눈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안타깝고 불쌍히 여기면서 그를 바라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 때문입니까?” 예수께서는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다” 이 말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그것으로 진흙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흙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에 발랐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실로암 샘에 가서 씻어라” 그 사람은 샘으로 가서 씻었고, 기적과도 같이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걸하던 곳으로, 예수께서 자기 눈에 진흙을 발라서 치료해준 곳으로 달려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수가성의 상처받은 여인을 바라보신 것처럼,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바라보신 것처럼,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을 바라보신 것처럼, 배고파하는 자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을 바라보신 것처럼 그 소경을 바라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정죄와 판단과 조롱과 멸시의 눈으로 보았지만, 예수께서는 안타까움과 긍휼의 눈으로 거지 맹인을 바라보셨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자신의 잣대와 기준과 선입견과 편견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평가와 판단과 정죄를 합니다. 돈과 성공과 외모와 스펙으로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내게 어느 정도 이익이 있을까? 저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가? 저 사람을 만만하게 대할 수 있을까? 자신의 이기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기 쉽습니다. 심지어 배우자를 고를 때도 그렇습니다. 덕 좀 볼 수 있는 사람, 돈 있고, 세력 있고, 가문 있는 사람을 보며 찾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과연 우리는 사람을 볼 때에 어떻게 바로보는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보는가? 겉으로 볼 때에 허름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가? 사업에 실패했거나 실직한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보는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을, 화를 내고 소리 지르고 있는 사람을, 깊은 상처로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을, 장애가 있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사람들은 왜 저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냐고 비난하면서 봅니다. 저 사람은 게을러서 돈도 못 벌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봅니다. 저 인간은 열심히 안 했으니까 실패했다고 멸시하면서 봅니다. 네가 그렇게 당할만한 행동을 했으니까 그렇게 당한다고 정죄하면서 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당하고, 실패하고, 상처받고, 돈이 없는 것이 실수와 실패와 잘못과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선 긍휼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셨습니다. “먹을 것을 주어라”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께서는 인자와 긍휼로 만나주셨고 거지 맹인을 보면서도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가난하고, 눈이 안 보이고, 거리의 걸인이고, 하루 구걸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즉 당신이 해줄 수 있는 바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비판, 비난, 정죄하기 전에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서 하길 원하시는 것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상황에서 하시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을 때에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밤이 되면 할 수 없으니까, 할 수 없을 때까지 가지 말고, 일할 수 없을 때까지 미루지 말고 지금 할 수 있을 때에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생길 때 해야지, 안 하면 있었던 마음도 사라집니다. 아까운 마음, 이기적인 마음으로 바뀝니다. 돈 없으면 못합니다. 물론 돈 있다고 다 하는 것은 아니지만, 돈 없으면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건강이 없으면 못합니다. 나이 들면 못합니다. 때를 놓치면 못합니다. 사랑도 용서도 죽고 나면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관계 속에서, 삶 속에서 하나님이 하실 일들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