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6일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4천도가 넘는 뜨거움과 피폭으로 14만 명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원자폭탄 2개로 엄청나고 잔인한 살상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하게 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일본에게는 무자비한 일이었는지 몰라도, 무참히 당하고 있던 우리나라에 광복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몇몇 나라에 수탈, 징용, 위안부, 강간, 생체실험, 살인 등을 저질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천황에게 절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그것을 거부하면 감옥에 가두고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원폭 투하가 일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그것을 반인륜적이고 불의한 것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우리나라는 식민지 상태로 고통과 억압으로 살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일본의 패망을 성경 속에서의 하나님의 재앙과 진노의 사건들과는 다른 부분이 있지만, 성경에서도 멸망의 사건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은 온 땅의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평화롭게(?) 사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악하신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정욕과 탐욕으로 살아가는 죄악으로 포장된 거짓 평화였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성의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악하신 것인가요? 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심술을 부리고 심판하신 것인가요?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노아시대에도, 소돔과 고모라에도 많은 기회와 시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와 죄악이 넘쳐나는 가나안 땅을 오랜 시간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죄악이 넘쳐나서 터져버린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징계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레18:24~2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신7:2)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볼 때에 옳은 것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옳고 그름의 판단자이며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볼 때에 이익이 된다고 해서 결코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내게 유익하고, 편리하고,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주인인 것입니다. 내 생각과 이익이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수결이라고 해서 옳은 것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최근 99.8%의 찬성으로 개헌안이 만들어지면서 중국의 장기 집권이 만들어졌습니다. 과거 우리나라도 독재 정권 시절에 유신헌법이 91%의 찬성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몇 차례 동안 대통령 선거인단의 거의 100% 찬성으로 대통령이 추대되기도 했습니다. 북한 인민 100%가 찬성한다고 김정은 세습 정권이 옳은 것인가요? 이런 것들은 사람의 탐욕과 권력과 거짓 사상이 주체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합리성과 경험대로 하는 것이 선이 아닙니다. 형평성에 맞게, 민주적으로 행한다고 해서 무조건 선이 아닙니다. 선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과 같게 하는 것이 선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최고의 명령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가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主)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를 주(主)로 시인하는 것이며,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첫 번째, 핵심이 바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가 아니고,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했습니다. 로마 황제와 많은 우상들이 있지만 예수님이 주라는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사실 로마시대에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은 놀랍고 대단하고 아주 위험한 고백입니다. 로마의 황제가 신이며 주라고 고백하는 것을 강요받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로마 황제가 주가 아니라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많은 순교자들도 나왔습니다. 수많은 우상들이 있고 황제가 있지만 예수만이 진짜 주이며, 그리스도이며, 왕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대단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목숨을 건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나 자신이 죽은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예수를 믿는 것은 ‘나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결정하고 판단할 때에 나는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맞습니다. 내가 죽게 되면 예수님이 내 안에 진정으로 사십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이 살아계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한 분은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아내가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지더라고 하십니다. 왜죠? 그 분 안에 예수님이 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게 되니까 남편의 말에 순종하게 되더랍니다. 왜요? 예수님이 그 분 안에 사시기 때문입니다. 한 성도는 예수님을 믿게 되니까 까칠하고, 날카롭고, 자기 중심적이던 자신이 많이 넉넉해지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그 분 안에 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지못해서, 억지로, 할 수 없어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의무와 억압과 불행입니다.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사는 것처럼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부활절입니다. 내가 죽고 예수가 사는 부활절 되세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