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할 때 어떤 사람은 뛰면서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지만, 앉아서 가볍게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찬양할 때는 앉아서 박수만 쳐야 하는가, 아니면 일어나서 박수치며 뛰어도 되는 건가요? 성찬식을 진행할 때에 우리 교회에서는 한 분씩 나오면 담임목사인 내가 빵을 뜯어주고, 잔을 따라주는 방식으로 합니다. 어떤 교회는 성찬기에 떡 조각을 작게 잘라서 돌려서 나누며, 잔도 성찬기에 담아서 돌려서 성찬을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지금까지 맞고 틀리고의 ‘중대한 원칙’의 문제인가요, 아니면 ‘선호’의 문제인가요?
초대 교회 당시네 로마 교회에서는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로 심각한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가르쳐줍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롬14:1~2) 그 당시에 사람들이 먹던 고기는 거의 이방 신전에서 제물로 사용된 후에 시장에 유통되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이므로 부정해져서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또는 아무 의미도 없는 무력한 우상 앞에 놓여 졌던 고기를 먹는다고 해롭거나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실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일지라도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음식이 어떤 효력을 발휘해서 믿는 사람을 더럽고 악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상 앞에 놓여 졌던 고기를 먹는다고 해롭게 되지 않습니다. 사실 초대 교회 당시에 고기, 포도주, 특정한 날에 대한 문제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물론 구약 시대에는 먹지 말아야 하는 음식이 있었지만, 이제는 율법적인 잣대와 구약적인 사고로 적용할 의미가 사라졌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부정한 음식을 거부했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깨끗하다고 한 음식을 네가 더럽다고 하지 말라’고 하는 세 번의 환상을 기억할 것입니다.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부정하다고 할 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막7:18~19) 그리스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제사 음식과 같은 것에 개의치 않고 넘어설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막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 중에서는 과거에 우상에게 고기를 바치면서 어떤 의식과 종교적인 마음을 가졌던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 전까지 종교 의식을 행하던 음식을 아무 거리낌 없이 먹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적으로 꽤나 불편할 수 있습니다. 습관이나 고정관념을 정리하는데 있어서 준비와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지나서 나중에는 의식하지 않고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왜 고기를 안 먹느냐?’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을 왜 먹지 않느냐, 당신이 복음을 아는 것이냐?’ 비판하고 비난해서는 안 되겠지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14:3) 그렇습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받아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받아주신 사람을 우리가 거부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가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파티에 허름한 옷을 입고 참석한 사람일지라도 주인이 초청했다면 누구도 쫓아낼 수 없습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동생을 받아들였을 때에 형은 여전히 동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 셈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성격, 성향, 기질의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사고력과 이해력이 높은 사람이라고 인정하면 어떨까요? 강박적인 사람들은 세밀하게 실천력이 뛰어난 사람이며, 짜증이 자주 나는 사람들은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며, 화가 자주 나는 사람들은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며, 우울한 사람들은 이상이 높은 사람이며,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보호본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인정하면 어떨까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는 황금률보다 더 좋은 원칙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한다는 것은 ‘재판’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재판하고 심판할 수 있나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제대로 판단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2:1) 무엇보다 우리는 누군가를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하면서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의 자유에 맡기는 행위들도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한다면 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10:23)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아들여주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나는 불완전하고 작은 존재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외로울 때도 있고 두려울 때도 있다. 그게 정상이다. 잘난 때도 있고 못난 때도 있다. 옳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그게 나다. 그래도 괜찮다.’<가짜감정 중에서> 이렇게 자신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수용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불완전함, 한계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