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로 얼마 전에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거의 5년 만에 만나서 너무나도 반가웠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를 듣자니 5년 동안 교회를 떠나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좀 멀리 이사를 가게 되었고 이런 저런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서 교회에 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요즘 마음이 너무 불안하고 초조했다고 하면서 차를 타고 근처를 지나다가 교회 쪽으로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그 분과 대화를 하면서 많이 기다리던 하나님이 그 분을 찾아가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식일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성전 옆에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워서 물이 움직이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과거에 그런 일이 일어났었든지, 수많은 병자들이 그 행랑에서 누워서 병 낫기를 위해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 낫기를 바라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베데스다 연못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도 치료를 위해서 어떤 노력이나 수고를 나름대로 했을 것입니다. 의원을 찾아다니고 좋다는 약도 써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어떤 노력이나 수고도 병을 치료하는데 효과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곳에 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이런 저런 방법을 쓸 형편이 안 되어서 그곳에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베데스다에 모여든 많은 병자들은 누워 있었습니다.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가 말라서 움직이기 힘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설사 물이 동하는 일이 있어도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연못까지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줄기 희망을 품고 그곳에 몰려들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마치 우리 인생을 압축해 놓은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은 기쁨과 즐거움도 있지만 고통과 절망과 괴로움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들처럼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도 없고, 치료받을 수도 없는 처참한 인생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이끌어서 구원해주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다 영적으로 병이 들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그 질병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누워 있는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병자는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처지에 어떤 희망도 없기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참혹한 자신의 모습에 고통스럽고 원망하는 인생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에 38년 된 병자가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혀 움직일 수도 없던 사람에게, 연못의 물이 동함이 있어도 그곳까지 갈 수도 없는 사람에게, 희망도 없이 그저 하루 하루 죽지 못해서 살아가던 사람에게 엄청난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질병과 고통과 어둠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우리 인생에게 찾아오셨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서 일어나 걸어갔던 것처럼 인생은 예수님을 만나야 일어날 수 있고 자리를 들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38년 된 병에서 나은 사람은 자신을 낫게 한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누구인지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치료받은 사실에 너무 놀랍고 감격스러워서 예수님에 대해서 물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문제 해결과 치료와 합격과 축복이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종종 해결 받고 치료받고서도 예수님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 분과의 진정한 만남과 교제의 풍성함도 모르고 그저 자신의 현실적인 처지가 나아진 것에 정신이 팔려버립니다. 그 현실의 즐거움에만 빠져 버립니다. 치료 받고도, 세례 받고도, 기적을 맛보고도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대학 입학을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했던 마음은 합격하고 나면 그 간절함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치료, 합격, 결혼, 취업 등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얻느냐가 중요합니다. 고난과 어려움과 부도와 실패가 복이 아니지만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얻느냐가 중요합니다.
진정한 복과 구원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고 알고 교제하는 것이 진정한 우리 인생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더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이 당하는 고난이 아프지만,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된다면 고난이 축복이 될 수가 있습니다. 고난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기에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하셨습니다. 그 사람의 병은 죄로 인해서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죄를 저질러서 그렇게 38년을 질병의 고통에서 억압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실 우리의 질병과 사고와 고난이 우리의 죄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영원한 저주를 받았으며, 만물이 저주 받았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2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이 땅에 모든 부정과 부패와 고통과 절망이 왔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생은 하나님과 단절되고 분리되어서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인생은 죄로 말미암아 가난과 질병과 질고와 고통과 온갖 수고와 괴로움을 짊어지고 살다가 영원한 죽음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아무 희망과 방법도 없던 우리 인생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있던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처럼, 스스로 치료하거나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인생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인생은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인생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영원히 멸망당해야 하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당신에게 찾아오셔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우리에게 최고의 복은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과 매일 매일 만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시고 마음껏 누리세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