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원, 서지형 부부는 아이가 없었다. 서지형 자매가 난소암을 앓아 임신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출산을 위해 수없이 병원을 드나들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입양도 거절당했다. 병원을 수도 없이 오가던 자매의 병원 기록이 입양도 못하게 막은 것이었다. 그래도 부부는 입양을 포기하지 않았고, 기적처럼 14개월 된 아이를 입양하게 되었다. 입양한 그 해, 부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미혼모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이와 함께 모텔에 있다” “지하방에 사는데 월세를 못 내고 있다” “전기가 끊겼다” 끊임없이 긴급 상황들이 이어졌다. 부부는 월세를 내주기도 했었다. 갈 곳 없는 미혼모와 아이를 데리고 와 함께 살았다. 18명의 미혼모와 좁은 집에서 살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3년을 개인적으로 돕다가 2015년 1월 비영리단체 ‘러브더월드’를 설립했다. 미혼모와 미혼부들의 실질적 삶을 돕고 자립할 수 있도록 출산 , 의료, 양육 지원을 위해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 부부는 또 한 명의 아이를 입양했다. 자신들이 만난 미혼모의 아이였다. 보육원 출신이었던 아기 엄마는 아이가 자신과 같은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부부가 이 아이의 부모가 되어주기를 부탁했다. 미혼모를 향한 부부의 사랑은 고갈됨이 없다. 미혼모들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박대원 서지형 부부’ 이야기이다.<빛과소금 12월호 ‘특집’ 발췌>
성경에는 양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은 목자이시며 이스라엘은 양으로 많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100:3)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40:1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목축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목축하기에 좋은 고센에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장인의 양을 치는 목자로 40년을 광야에서 훈련받았으며, 양떼와도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다윗도 어린 시절부터 목자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을 물어가면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맹수를 쳐죽였습니다. 양떼에 충성하던 다윗을 선택해서 하나님은 선택해서 하나님의 양떼인 이스라엘 백성을 맡기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했습니다. 어리석고 무능해서 구원에 이를 수도 없으며, 하나님께로 나아갈 능력도 없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 값을 받아서 영원한 지옥에 던져져야 당연한 죄악된 우리를 위해서 예수께서는 목숨을 버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며, 완전히 담을 쌓으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심판받아야 하는 우리를 위해서 죽어주셨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있겠습니까? 물론 영화를 보면 가족이나 나라를 위해서 혹은 지구 종말을 막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죄악 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반려 동물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기 비하이며 낮아짐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맹인, 듣지 못하는 자, 중풍병자 같은 병이 있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가슴에 품고 강청하는 여인을 그냥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는 과부의 절규를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욕설과 비난을 받아도, 유대인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는 일이 있어도 가난하고, 불쌍하고, 병든 자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에게 참된 안식을 할 수 있도록 치료하고 구원하셨습니다.
<빛과소금> 12월호 ‘특집’면에 실린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들이 외롭고 힘든 사람들의 선한 목자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미혼모들의 버팀목이 되어준 ‘러브더월드’ 박대원 서지형 대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안식처가 되어주는 ‘안산이주민센터’ 박천응 목사, 다문화 한부모 가정의 가족이 되어주는 ‘프래밀리’ 정종원 김성은, 쪽방촌 빈민들의 ‘등대교회’ 김양옥 목사, 독거노인들의 말벗이 되어주는 ‘나눔밥상’ 최윤경 대표, 소외청소년들의 캡틴이 되어주는 ‘이름없는 학교’ 송재한 대표, 버려진 아기들의 구조선이 되어주는 ‘주사랑공동체’ 이종락 목사, 자살 시도자들의 생기가 되어주는 ‘위드하우스’ 정진 대표, 성매매 여성들의 이모가 되어주는 ‘건강한약국’ 이미선 약사, 소년범들의 멘토가 되어주는 김기헌 감독, 소외된 아이들의 꿈 지킴이가 되어주는 ‘삼분의이’ 서현주 대표, 위기 청소년들을 향한 내리 사랑 ‘별만사’ 심규보 대표 등등. 그렇다면 목사인 나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광염교회 성도들을 위한 선한 목자인가? 하나님께서 마음 놓고 하나님의 양무리를 맡기시는 선한 목자인가? 목자의 마음은 늘 양무리에 있어야 하는데, 나는 양무리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 양무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목양하고 있는가? 내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낮은 곳에 있는가, 높은 곳에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삯꾼은 자기가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호언장담합니다.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처럼 기고만장합니다. 그러다가 위험과 어려움이 닥치고 맹수가 나타나면 자기만 살자고 도망갑니다. 자기에게 손해가 될 것 같으면 버리고, 안 만나고, 거절하고, 충성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양의 문이며, 선한 목자라는 사실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께로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먹습니다. 예수님께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으며 더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