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하주가 어렸을 때는 침대 위에서 아빠 품으로 몸을 던지면서 떨어지는 놀이를 많이 했다. 아빠는 침대 앞에 서 있으라고 하고는 몸을 던진다. 아빠가 안 받아준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때로는 양쪽 팔을 붙잡고 빙글빙글 돌려달라고 한다. 아빠가 잡았던 손을 놓아서 자기가 다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것이 믿음이 아니겠는가? 부모를 믿고 신뢰하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18:16)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어 있는 베다니로 가지 않고 이틀을 더 머물렀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하셨다. 이틀 후에 베다니에 이르셨지만 나사로는 죽은 지 이미 나흘이 지난 후였다. 늦게 온 예수님을 원망하면서 마르다는 말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은 없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셨다. 무덤은 크고 무거운 돌로 막아 놓은 상태였다. 예수님은 “돌을 옮겨놓으라”고 하셨다. 그러나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고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고 했다. 마르다는 돌을 왜 옮겨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돌을 옮긴다고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는 것이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을 옮겨야 한다. 믿음으로 돌을 옮겨야 한다.
믿음이 없는 말은 이렇게 표현되는 것 같다. “전 못해요” “힘들어요” “그건 안 될거예요” “너는 안 돼” “나는 안 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이런 말을 하면서 정말 안 되게 만든다. 될 것도 안 되게 해 버리는 대단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 믿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 믿음의 근거를 두는 것이다. 나의 능력과 소망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참으로 초라하다. 마르다와 마리아와 같다. 그리고 풍랑을 만난 제자들 같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데도 그렇게 믿음이 없다. 예수님은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다. 그리고 가르쳐주셨다. “믿음이 없는 자들아 왜 두려워하느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돌을 옮겨놓으면 된다.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신다. 우리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까지 하려고 하니까 두렵고 무섭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을 안 하면서 믿는다고 말만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을 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그러므로 믿는 것은 행동이 수반되는 것이다. 돌이 옮겨져 있어야 나사로는 살아나서 나오게 된다.
믿음의 눈으로 문제를 보라보아야 한다. 가나안 정탐을 한 열 두 명의 정탐꾼은 동일하게 포도, 큰 성읍, 거인을 보았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니 자신들이 메뚜기로 보였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는 그 땅은 그들의 밥으로 보였다. 불신앙의 눈은 확대경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서 자신이 메뚜기로 작아 보일 수밖에 없다.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세상이 결코 두렵지 않게 된다. 그리고 나의 전제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마르다는 “죽기 전에 내려오십시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죽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했다. 물론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 말은 “이 정도까지는 믿겠는데, 그 이상은 못 믿겠다”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지, 나의 욕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믿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에게 큰 믿음이 없는 것처럼 오해하고 자책한다. 믿음은 오히려 나의 목적, 나의 집착을 버리는데서 큰 역사를 이룬다.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해서 자기 욕망을 채우고 이루려는 헛된 욕심을 하나님은 허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신뢰하고 지키는 사람을 찾으셔서 그들을 통해서 일하신다.
2006년 강원도에 집중호우가 내렸었다. 인제 지역에 집중호우로 길이 끊기고 교통편이 없어서 완전히 고립된 마을들이 생겼다. 식수, 먹을 것, 속옷을 포함한 기초 생활용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방송에서는 마을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우리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은 “그래도 가자, 길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인제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 봉사단은 한 사람씩 직접 박스를 짊이지고 고립된 마을로 들어가서 그 물품들을 나눌 수 있었다. 믿음으로 가면 일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비상은혜’가 있다. 주일학교 캠프를 하고 체육대회를 하면서 날씨 때문에 하지 못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봉사하는 권사님도 “하나님의 몸인데 하나님을 위해서 쓰면 힘 주세요” “잘 못하지만,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세요”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다스리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죽는 것 같지만 부활하셨으며 모든 사람들을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셨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를 능가하며 역이용하신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인간의 지혜보다 낫다. 그러므로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 누군가에게 당했다고 억울해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처럼 손해 안 보려고 너무 발버둥치거나, 머리 굴리지 마라. ‘흙수저’라서 취업 안 된다고 억울해하지 말라. 취업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 차라리 져주고, 당해주고, 손해를 보라, 하나님을 믿고서 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차피 공부해서 남 줄 사람이다. 우리는 돈 벌어서 남 줄 사람이다. 우리는 손해 보면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몇 갑절로 베풀어주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을 때 할 수 있는 고백이며 삶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지혜와 슬기와 능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전하게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우리도 믿음으로 선포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영혼아 일어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감사하라, 찬양하라, 기뻐하라, 평안하라”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