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우리는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다 알아서 정해주면 차라리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힘들고 머리가 아픕니다. 선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선택해놓고 잘못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민과 연단의 과정이 없으면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 엄마들이 자녀들 대신 선택과 결정을 해주었기 때문에 마마보이가 생겨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예수를 배반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가룟 유다를 대신할 새로운 사도를 세우자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한 후에 제비뽑기를 하게 됩니다. 결국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얻어서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비뽑기가 성경에 여러 차례 나옵니다. 어떤 일을 결정하고 판단할 때에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우림과 둠밈이라는 도구로 하나님의 뜻을 여쭐 때 사용한 것도 그와 유사하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하던 초기에 아간이 범죄 했을 때에 제비뽑기로 범인이 아간으로 드러났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비뽑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제비뽑기가 지금도 하나님의 뜻을 묻는 방법으로 유효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맛디아를 제비뽑기로 선출한 것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비뽑기를 통해서 맛디아라는 사도를 얻은 것은 규범이 아니라 어떤 사건의 묘사입니다.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기술이지 제비뽑기가 규범이며 모범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 방법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다 예정하신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셨으니까 우리는 뒷짐 지고 있어야 되지 않는가?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니까 어차피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되는 것인가? 굳이 열심히 안 해도 되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예정을 결정론적으로, 강박증적으로 보아선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을 자신의 배우자로 하나님이 다 예정하셨다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꿈이나 사인으로 알 수 있을까요? 자칫하면 사인에만 집중하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자기 욕심이나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사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자기 맘에 들 때까지 계속해서 사인을 구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마음에 들면 하나님이 답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자칫하면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신비한 사인만 찾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과정과 선택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그런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을 알아가고 만나서 대화하고 파악해서 나에게 맞는 사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알아야 나에게 맞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를 알아야 나에게 맞는 배우자, 일, 사업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묻고 여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운명적인 사랑을 꿈꿉니다. 그런데 영화처럼 운명적인 사랑을 만났다고 끝까지 잘 되고 완벽하던가요? 운명적인 사랑을 했다고 하지만 결혼에 실패한 연예인들이 가십거리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에릭 프롬은 “서로 ‘미쳐 버리는 것’을 사랑의 뜨거움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왔는가를 입증할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맞추어가고, 연습해가고, 훈련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찌 보면 선택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선택한 그 상황을 감사하며 인정하며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처음 만나자마다 “하나님이 딱 맞게 주셨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갈등하고, 고민하고, 어떻게 맞지, 왜 다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관계이며, 특히 부부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오래 살아 본 후에 정말 하나님이 하셨구나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이것 때문에,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를 만나게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이 참으로 귀합니다. 인생의 그림을 그리기도 전에 하나님이 예정하셨어, 혹은 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정이 자칫하면 너무 결정론적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나의 선택은 전혀 무시하고 외면하시는 하나님으로 왜곡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과 충돌합니다. 예정을 지나치게 사용하면 결정론과 강박론이 됩니다. 섭리는 관계를 전제로 하는, 상호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선택과 책임이 있지만 또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선택, 책임, 허용, 내버려두심, 상급을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죄나 실수나 과오를 하나님의 뜻과 연관시켜 합리화 혹은 정당화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결코 죄악의 길을 걷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악을 인정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사용해서도 당신의 선한 일을 행하는 분이신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다 아시지만 모든 것을 결정론적으로, 전혀 우리의 의사, 선택, 결정도 하지 못하도록 설정해놓으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로봇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사를 존중하십니다. 우리에게 선택과 책임의 여지를 충분히, 우리 능력 이상으로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기쁨과 능력을 맛보는 삶을 주셨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