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소다(누나: 소을, 동생:다을) 남매의 우애는 참 좋습니다. 동생 손잡고 가기, 먹여주고 챙겨주기를 소을이가 잘 합니다. 소을이가 자기 밖에 모르는 동생 다을이 때문에 삐치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그럼 다을이는 울고 있는 누나를 달래줍니다. 서로 챙겨주는 모습이 참 귀엽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민필이와 민건이 형제가 있습니다. 몇 년 동안 형 민필이는 몸이 아픈 동생 민건이를 데리고 유치부 예배를 같이 드렸습니다. 한 동안 민필이는 치매가 있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동생이 컸고 몸이 많이 좋아져서 혼자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민필이는 중학생인데 이제 자유롭게 중고등부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잘 챙기고 도와주는 형제를 보면 부모는 말할 수 없이 기쁠 것입니다.
성경에는 형제를 배려하는 사랑의 율법이 나옵니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형제에게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집이 멀거나 알지 못하는 형제의 것이거든 잘 두었다가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나귀, 의복, 어떤 것이든지 다 못 본 체하지 말고 돌려보내라는 율법입니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도와서 일으켜주라고 합니다. 시편133편에서는 형제 사랑을 하나님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하나님께서는 형제가 화목하고 잘 지내는 모습을 보시면서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씀하십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다"고 하십니다. 기름부음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만 해당됩니다. 대제사장 대관식에서 대제사장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이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름부음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하는 특별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에 가보면 헐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세차게 내려옵니다. 일년 내내 헐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멈추지 않습니다. 헐몬산에 쌓인 눈과 이슬은 그 주변 강과 땅을 일년 내내 적십니다. 이스라엘에서 헐몬산의 마르지 않는 물은 농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헐몬산의 물은 풍성함과 넉넉함을 상징합니다. 형제가 사랑하는 모습이 이렇게 풍성하고 넉넉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가 사랑하는 곳에 헐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풍성하고 넉넉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고 하십니다. 이렇듯 형제를 사랑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영생이란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천국입니다. 죽어서도 천국을 얻겠지만, 이 땅에서도 천국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곧, 천국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 많은 재벌, 권세가 있는 가문이라도 형제가 서로 다투고, 법정 싸움을 하는 것처럼 볼썽사나운 것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돈 때문에, 부모 서로 떠넘기려는 다툼 때문이라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형제가 하나 되며, 성도가 하나 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이 땅에서 잘 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형제를 사랑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예수님은 잠시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유언과도 같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나서며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하면서 죽음을 불사하더라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만만하게 목숨까지 바쳐서 주님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베드로에게 대단한 사역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랑하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사랑하면 됩니다. 싸우면서 일하려거든 일하지 맙시다. 잘 하려고 하다가 싸우지 말고 싸우지 말고 차라리 중간만 합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해 주셨는가를 알 때만이 우리가 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고민해야 할 것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놓고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은 만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만큼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려드릴까요?
며칠 전 아침에 잠에서 덜 깬 열 살 먹은 딸 하주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웃었습니다. 그런데 하주는 아빠가 비웃는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내게 기분 나쁘다는 투로 묻더군요. “아빠, 왜 웃어?” “응, 하주가 예뻐서 웃었어” “뭐가 예쁜데” “아빠는 하주가 웃어도 예쁘고, 울어도 예쁘고, 장난쳐도 예쁘고, 밥 먹어도 예쁘고, 띵깡 부려도 예뻐” “아빠, 그럼 내가 똥 쌀 때도 예뻐” “응, 똥 쌀 때도 예쁘지”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주를 그렇게 예뻐하신단다” “하주가 잘나서, 공부를 잘 해서, 운동을 잘 해서가 아니라, 조건 없이 예뻐하신단다” 하주가 그 날은 다른 날보다 더 신나서 노래하고 놀더군요.
하나님은 당신을 조건을 가지고 예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존재 자체를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그렇게 존귀하고 보배로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신은 사랑 받아 마땅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녀도, 형제도 그 자체로 존귀하고 보배롭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