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 주립대학에서 미국 고등학생 대상으로 ‘결혼에 대한 의식 조사’를 했습니다. 3분의 1에 조금 못 미치는 여학생과 3분의 1을 살짝 웃도는 남학생들만이 결혼하겠다는 응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결혼에 대한 생각들이 기대와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결혼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배우자와 가족과 공동체를 위해서 나를 희생하기로 약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자신의 꿈과 자아실현을 위한 디딤돌이라고 생각합니까? 성경에서는 결혼이란 성취와 희생 사이에서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희생을 통해 상호 성취하는 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신이 아닌 상대의 유익을 위해 도와주고 헌신할 때에, 자신과 공동체의 평안과 유익과 풍성함이 이루어진다고 말씀합니다.
구약 율법에서 유부녀나 처녀를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욕보이고 강간하면, 그 남자는 죽음을 당하거나 그 처녀의 몸값을 지불하고 아내로 맞아야 했습니다. 물론 결혼하는 선택권은 처녀와 그 부모에게 있었습니다. 간음은 사람을 인격체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 욕구와 탐욕을 채워주는 도구로만 보는 것입니다. 사람을 인격체로 여겨야 합니다. 어떤 존재이든지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여겨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타인의 욕망과 탐욕을 채워주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간음은 영혼을 망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간음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부부 관계를 건강하고 건전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우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부가 서로의 욕구와 필요를 건강하게 해소해야 합니다. 부부가 분방해서는 안 되며, 성생활도 하고, 취미 생활도 함께 하면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성은 본인이 아니라 배우자가 주관하게 해야 합니다. 부부의 성관계로 무기를 삼지 말아야 합니다. 부부의 성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요즘 동거를 하는 경우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함께 살아보는 것이 보다 나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동거를 통해 상대에게 정말 끌리는지, 이른바 ‘화학반응’이 충분한지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의를 둘러보면 함께 살아보지 않고 서둘러 결혼부터 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금방 이혼을 한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동거를 하는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경제적인 기반을 잡은 후 집 한 칸이라도 장만할 여유가 있을 때 결혼을 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구 결과를 보면 ‘결혼이 주는 놀라운 경제적 이익’이 있다고 합니다. 지속적으로 결혼 생활을 해 온 이들이 현직에서 물러나는 시점을 기준으로 했을 때 평생 결혼한 적이 없거나, 이혼한 뒤에 재혼하지 않은 이들보다 재정 상태가 평균 75퍼센트 이상 더 양호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혼한 남성의 경우 비슷한 교육 수준과 경력을 가진 다른 이들보다 10~40퍼센트 정도 더 많은 수입을 올린다고 합니다. 결혼한 사람들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훨씬 더 건강한 생활을 영위한다고 합니다. 아울러 결혼은 절망적인 상황이나 질병을 포함해 여러 어려움들을 무난히 처리하도록 돕는 고성능 ‘충격 흡수 장치’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거해서 결혼한 부부가 동거하지 않고 결혼한 부부보다 이혼율이 높다고 합니다. 동거하는 사람은 동거인이라고 하지 아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남편은 ‘동거인’이 아니라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콩깍지가 벗겨지면 사랑은 어떻게 하죠? 진짜 사랑은 그 때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겠다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행동이 감정을 부른다고 결혼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청소를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하다가, 하고 싶은 감정이 생겨나면 하는 것인가요? 부부 성관계의 감정이 생기지 않으니까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부부 관계는 어떤 방법으로 좋아질 수 있을까요? 점점 더 멀어질 뿐입니다. 행동을 해야 좋은 감정도 생길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부부는 딱 맞지 않고 다릅니다. 부부는 다름의 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방식, 언어, 주파수가 사람마다 다릅니다. 사랑을 느끼고, 사랑해주는 방식이 다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부부가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 얼마 전에, 결혼 관련한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제프라는 남자는 달변이어서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능수능란하게 웃기고 울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현재를 즐기는 남자입니다. 수라는 여자는 조용하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성격입니다. 그러나 결단력이 있으며 미래지향적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면 때문에 호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수는 생각하기를 주변에 여자가 많은 이 남자가 조용하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자신을 좋아해주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제프는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여자가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껴서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1년을 살면서 서로 너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자는 생각하기를, 이 남자는 남의 말에는 좀처럼 귀를 기울이지 않고 혼자 떠들어대는 자아도취적인 성향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혀 현실을 생각하지 않는 남자로 여겨졌습니다. 제프는 생각하기를, 이 여자는 겉으로는 어수룩한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엉큼한 데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조근 조근한 말투로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속성이 있다면서 결혼을 후회하며 가슴을 쳤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결별을 선언했다고 합니다. 참 이상하지 않나요? 서로 다르다는 것 때문에 매력을 느꼈다가 서로 다르다는 것 때문에 헤어집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사랑에도 언어가 있는데 다섯 가지로 케리 채프만은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전달 방식은 크게 인정하는 말, 함께 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쉽의 다섯 가지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한국 사람이 중국 사람하고 의사소통하는 것이 쉽나요? 혹은 미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하고 의사소통이 잘 되나요? 어렵습니다. 대화와 소통을 위해서는 그 나라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나는 봉사와 인정하는 말이 사랑의 언어입니다. 아내가 맛있는 밥을 해서 차려주면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내가 입을 와이셔츠나 옷을 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예뻐 보입니다. 그런데 아내는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기계 같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자신을 위해서 사랑의 말로 감정과 마음을 터치해주고 자극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참 어렵고 힘듭니다. 아제 개그를 해주면 시큰둥하면서 오히려 시덥잖다고 합니다. 할 의욕을 상실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과일도 깍아주고, 설거지도 해줍니다. 청소도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해주고는 나의 사랑을 알아주겠지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시 시큰둥합니다. 혼자 내버려두지 말고, 함께 하면서 말로 마음과 감정에 사랑을 채워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나는 기도합니다. “오 주여, 내게 말의 능력을 주옵소서”
남편은 아내의 언어로 아내가 알아듣기 좋게 사랑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의 언어로 사랑한다고 해줄 때에 남편의 그 언어를 이해해주십시오. 서로 맞추어가고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남편들에게 말씀합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5)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5:28)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 기도가 막힌다는 것은 삶이 다 막힌다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삶이 안 풀립니다. 평안하지 않습니다. 참된 행복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남편 여러분, 행복 하고 싶으세요?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