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영원한 삶을 추구합니다. ‘나는 죽는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아직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그것이 증거입니다. 인생의 태어남과 죽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므로 시작과 끝을 측량할 수 없으며 알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오늘 밤에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밤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굳이 밤에 온 이유는 그는 바리새인이며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유대인의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나는 것이 알려지면 ‘너도 예수의 한 통속이냐?’ ‘예수의 제자냐?’고 어려움과 외면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과격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상을 엎고, 짐승들을 쫓아내고,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고 하면서 종교지도자들에게 정면으로 대항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백성들에게는 인기를 얻었지만,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렇지만 니고데모는 예수라는 존재가 궁금했습니다. 많은 이적, 병자 치료, 귀신 축사, 성전 청결, 성전을 허물면 사흘에 지으리라는 말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인가?’ 니고데모는 진실을 알고 싶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너무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어서 ‘이미 태어나서 성장했는데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바람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그러하다’고 말씀하시죠. ’거듭난다‘는 것은 한자로는 중생(重生), 영어로는 born again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죠.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은 이미 심판에 놓인 상태입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영원한 멸망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죠. 멸망의 열차를 타고 멸망의 불구덩이로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인간이 영원한 멸망으로 달려가게 되었을까요? 인간은 죄인이며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해결해야 하는데 죽음밖에는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해결 방법으로 아들을 보내십니다. 사람의 대표인 아담이 범했던 죄에 대한 대가를 둘째 아담 예수님이 감당하십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죽음으로써 대가를 치룬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의 자격이 됩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을뿐이지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서 죽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단번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9:12)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에, 물과 고기가 없다고 원망 불평이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불뱀에게 물린 사람들은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으로 뱀을 만들어서 지팡이에 달게 하셨으며 놋뱀을 바라보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놋뱀이 무슨 효력이 있습니까? 놋뱀을 바라보면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놋뱀을 바라본 것이죠. 광야시대에 놋뱀을 바라보는 자는 살았던 것처럼,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는 살게 됩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하나님의 새로운 혈통을 받는 것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그 마음 안에 들어오셔서 임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 사람의 생각에는 거듭남을 이해할 수 없고,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 진리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과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절묘하게 이루시는 방법이셨죠. 그러나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낸다는 것이 쉬울까요? 우리는 큰 아픔을 만났을 때,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큰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