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부끄러운 것이 있나요? 사람마다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부끄럽게 여기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잘 모른다고, 못한다고, 자격이 없다고, 내세울만하지 않다고 하면서 부끄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객관적으로 볼 때는 괜찮은데, 그럴 수도 있는데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책임이 아님에도 자책하면서 부끄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반면에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하게 여기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오히려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능력인데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최고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구원을 자랑스럽게, 당당하게, 소중하게 생각하며 많은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죠. 구원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기에 그렇습니까?
첫째, 구원은 천국입니다. 구원은 영원한 멸망에 던져지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은 영원한 죽음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사고가 났을 때에 생명은 소중하기 때문에 위급상황에서 골든타임이 지나기 전에 사람을 살리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죄와 사망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떻습니까? 복음 자체인 예수님을 믿어야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므로 복음을 지체없이 전해야 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둘째, 구원은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땅에서 행복한 유토피아를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돈, 쾌락, 인기, 권력 등으로 행복을 얻으려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영혼은 세속적인 것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영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허무함이 채워집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07:9)
셋째, 구원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 성령으로 변화되어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의 인격과 신앙이 성장하고,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성화의 과정입니다. 우리 본질을 알아서 성숙해 나가는 성화는 이 땅에서 이루는 구원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이룹니다. 예수가 세상의 왕, 통치자, 심판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인도하시며 동행하시는 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삽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갑니다. “보라 악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사건은 믿음의 행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하셨고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구약 시대 제사 자체가 얼마나 효력이 있겠습니까? 동물을 드린다고 어떻게 죄가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명하신 제사를 드릴 때 용서해주시는 약속을 믿고 드리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시대부터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았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것들로만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든지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으로 삽니다. 세상의 일들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코로나19, 부조리, 불합리한 사건들,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나지만, 선하신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믿음으로 삽니다. 오늘을 살면서 고난과 어려운 현실 앞에서도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대하며 꿋꿋하게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