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중요한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역사를 살펴보아도 한 사람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회나 국가든지 사람에 관심을 갖고 집중해서 투자를 하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역시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몇몇 유대인 성도들이 안디옥이라는 도시에 와서 유대인이 아닌 헬라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합니다. 그 당시 복음이 아직 헬라인에게는 전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헬라인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됩니다. 교회의 본부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 이 소식이 전해집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소식을 듣고 상황 파악을 위해서 바나바라는 사람을 안디옥에 보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2~26)
착한 사람은 온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까칠하지 않습니다. 싸움닭 같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당장은 세상이 정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며, 자신이 공정하게 대우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며, 공정하신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면 정의와 공의를 자신의 힘으로 세워야 한다고 하면서 싸우고 투쟁하는 것에 앞장서게 됩니다. 물론 때로는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싸우기 전에 자신과 싸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욕심, 정욕, 시기, 질투, 미움, 이기심으로 충만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다소에 칩거하던 사울에게 찾아가서 안디옥에 데리고 왔습니다. 그는 사울을 복음 전파의 중심에서 사역할 수 있게 했습니다. 시쳇말로 ‘앗싸’를 ‘인싸’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바울의 행전은 바나바의 도움과 헌신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나바는 큰 무리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바나바로 인해서 안디옥의 성도들에게 새로운 별명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그 당시에 친숙하고 익살맞은 표현이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조롱 섞인 비속어로 사용된 것이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예수 밖에 모르는 외골수,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오늘날 표현으로 ‘예수쟁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적합한 뉘앙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안디옥의 사람들은 ‘님프’라는 요정과 ‘박쿠스’라는 신을 섬겼습니다. 박쿠스는 우리나라에서는 박카스로 더 유명합니다. 성, 쾌락, 술의 신입니다. 그만큼 안디옥은 음란과 쾌락의 도시였습니다. 그런 도시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르게 살게 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조롱 섞인 말로 불려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 다르다며 비웃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 당시의 '헤롯의 사람'과 '가이사의 사람'과 구별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추종하는,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원리가 아닌 그리스도의 원리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가 인생의 주인인 사람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큰 흉년이 들자 그 힘이 닿는 대로 예루살렘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합니다.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에 헌금을 예루살렘에 보냅니다. 안디옥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상하네, 저 그리스도인들의 형편으로는 저렇게 할 수 없는데?' 돈이 남고 여유가 있어서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풍요로워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닌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닮을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마치 자녀가 부모를 닮은 것을 보고 부모가 기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단순히 편안한 삶이 아니라 성장해서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단지 성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이 그 사람의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성장은 우리가 노력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100%와 성령의 100%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하면 착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게 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