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큰 관심사 중의 하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헬라어로는 '밖으로 불러 모으다'는 의미를 가진 에클레시아입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불러 모아진 거룩한 자들의 모임,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의 모임을 교회라고 합니다. 요즘 내 마음 속에 있는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동체’입니다.
요즘 한국은 ‘가나안’(교회 안나가) 교인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가나안교인들은 생각합니다. ‘굳이 교회에 다닐 필요가 있나? 만나기 싫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그들은 이중적으로 보이는 교회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가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들은 교회를 떠나고 맙니다.
최근 나는 필립 얀시가 쓴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필립 얀시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나도 모태신앙이었기에 저자의 어린 시절에 공감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 책 안에는 ‘나의 교회 방랑기’라는 제목으로 그가 교회를 떠나서 방황했던 가나안 교인 시절 기록도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매주 일요일 아침과 저녁은 물론 여름성경학교, 중고등부 예배와 활동, 수련회, 부흥회, 선교대회 같은 행사를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스테인글라스 유리창을 통해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교회는 죄 많은 바깥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외면적 규율의 벽을 두껍게 쳤다. 어떤 면에서는 더 심한 문제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준 성과는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에는 빠지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율법적인 태도나 강압적인 규율이 그의 신앙의 성장을 가로막았습니다. 그의 표현으로는, 기독교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겉으로는 웃지만 마음을 숨기려는 위선자로 보였습니다. 그는 불완전하고, 실패하고, 죄를 범하는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싫었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르게 보이는 모습에 염증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는 교회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불완전하다고 우리는 가정이라는 제도를 버려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불완전하지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그는 깨닫게 됩니다. 신앙의 불은 혼자서는 타오를 수 없으며 꺼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를 하나님의 응급진료소, 복지 사무소, 동네 단골집 등으로 표현합니다. 장시간 열려 있고, 찾기 쉽고, 불시의 응급 사태로 찾아오는 사람들의 필요를 기꺼이 채워 주는 곳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부자유자들과,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과, 의지가 약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그리고 뛰어난 실적으로 성공한 자신만만한 사람들, 누구의 도움도 청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정상에 오른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복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내게 삶의 길을 가르쳐 주실 유일한 분임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을 인용하면서 안디옥 교회를 모델로 건강한 교회의 몇 가지의 특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교회는 위를 올려 보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올려 보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주인공은 목사도, 성도도, 어떤 형식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이시며 가장 중요한 관객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배당에서 가장 중요한 관객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내가 무엇을 얻었는가?’ ‘내가 은혜 받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셨는가?’ ‘하나님이 나의 예배를 받으셨는가?’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13:2) ‘섬겨’의 의미는 봉사하다는 개념이 아니고 예배한다(worship)는 의미이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 가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둘째, 건강한 교회는 주위를 둘러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중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많은 것이 건강한 교회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즉 교회 공동체는 국적, 인종, 계급, 신분, 직업, 빈부, 외모, 나이, 성별의 모든 차이를 뛰어넘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행13:1) 안디옥 교회 안에는 다양한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있었다. 바나바는 구브로섬 출신의 레위지파 유대인이었다. 시므온은 니게르라고 흑인이었습니다. 루기오는 라틴어식 이름으로, 그는 구레네 사람,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이방인이었습니다. 마나엔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와 같이 자란 젖동생이었습니다. 즉 권력의 혜택을 받아서 거만하거나 사람들과 가까워지기 쉽지 않은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써 예수 믿는 사람을 가장 강하게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다양하다 못해서 복잡한 문화적, 사회적, 인종적 배경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물론 안디옥이란 지역이 그 당시 워낙 세계적인 도시여서 그랬을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교회는 남녀노소, 신분 귀천을 막론하고 예수님 안에서 가족입니다. 가족이란 “내가 가정으로 갔을 때 식구들이 나를 받아 주어야만 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이 가장 잘 돌아갈 때는 서로의 차이를 무시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 차이를 즐거워할 때입니다. 건강한 가정은 강한 식구를 끌어내리지 않으면서 가장 약한 식구를 세워줍니다.
인간의 제도 중에서 유일하게 선택권이 없는 것이 가족입니다. 자신이 어떤 가족에서 태어나겠다고 선택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출생 자체로 이미 한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렇게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서 가족이 되는 곳입니다.
셋째, 건강한 교회는 밖을 내다보는 교회이다. 물론 자기 자신도 살펴야 하지만 밖을 잘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비조합원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 유일의 협동조합조직이다”라고 영국 성공회 주교였던 윌리엄 템플은 말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밖을 내다보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3)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는 어려운 형제를 살피며 구제하는 교회였습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11:29~30)
우리 교회는 4대 절기 헌금 전액을 구제와 선교비로 집행합니다. 2019년 결산에서 대외구제에 1450여만 원, 전도비로 4970여만 원을 집행했습니다. 재정의 18.4%입니다. 교회 돈은 세상을 향해서 흘러가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북한에 빵과 국수공장을 세웠습니다. 어린이 심방병원 등을 세웠습니다. 우리를 포함한 한국 교회가 계속해서 교회 밖을 내다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속으로 돈과 사람을 보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넷째, 건강한 교회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을 향한 경쟁과 비판의 독을 제거하고 대신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야 합니다. 나의 영적인 상태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정확하게 나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처럼 나를 알아야 제대로 나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안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교회 안의 식구를 살핀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 누구도 에너지와 관심을 쏟지 않았던, 가족도 없고, 직장도 없고, 안정도 없던 형제, 자매, 성도에게, 교회는 유일하게 안정을 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어머니 품 속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광염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물이나 돈이 고이지 않고 선한 곳과 필요한 곳으로 흘려보내는 교회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