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유일한 예배 대상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경배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나 ‘물질’로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의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청중을 감동시킬 것인가?’ ‘어떻게 하면 사람을 많이 모을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나 염려스럽습니다. 하나님이 강조되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물론 예배는 성도에게 기쁨과 확신을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만족이 예배의 목적이 아닙니다. 인간의 필요를 채워 주고, 멋있고, 세련되고, 화려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 예배의 목적이 아닙니다. “어떻게 성도들이 우리 예배에 만족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성도들을 하나님 임재 앞으로 인도할 것인가?”가 우리의 고민이어야 합니다.
창세기 3장까지는 천지창조와 아담과 하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4장부터는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의 제사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당시 제사는 우리에게는 예배입니다. 예배가 얼마나 중요하면 아담과 하와 이후 인류의 첫 번째 이야기로 예배가 등장할까요?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4~5)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배를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있어서 가장 유념할 것은 형식이 아니라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은 청중의 숫자, 헌금 액수, 화려하고 멋진 음악, 정확한 박자와 음정의 찬송 보다는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전부인 두 렙돈을 드린 과부와 그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와 그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중요하다.
지식, 신념, 과학, 문화, 학문, 기술 등이 결코 세상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필요하지만 학문, 기술, 예술, 과학, 문명의 이기를 운용하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똑같은 기술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따라서 그 쓰임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다이나마이트가 악한 자의 손에 있으면 살상무기로, 반대로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데 쓰는 자의 손에 있으면 터널공사나 낡은 건물을 제거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세우는데 무엇인 중요할까요? 사람을 세우는데 있어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학식, 열심, 인간관계, 능력, 감성, 용기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비결은 예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른 예배자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되며 하나님의 뜻과 다스림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할 때는 동서남북 세 지파씩 세우고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두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중심이었습니다. 1776년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해서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예배였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왔습니다. 미국에서 한 학기를 예배로 시작한 학생이 그렇지 않은 학생에 비해서 장학금을 받을 확률이 50퍼센트나 더 높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살려면 바른 예배자로 서야 합니다. 우리나라를 살리며 애국할 수 있는 길은 예배 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예배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배는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받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상한 심령과 병든 것을 고쳐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다스리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은 죄인이지만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가 씻겨 질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예배자는 최고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4:3~4) 우리가 최고의 것을 드릴 때에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받으십니다. 최고의 것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의 개념에 의하면 최고의 것은 무엇일까요? 처음 것은 최고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출13:2) 가인이 처음 것을 바쳤다는 말은 없습니다. 가인은 단지 땅의 소산 중에서 아무 것이나 추수해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가인은 최고의 것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로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최상의 개념인 양의 첫 새끼를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기름은 최고의 것이었기에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율법에도 기름은 태워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기름이 빠진 고기를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기름은 무엇인가? 지금 세상에서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지금 그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오늘이라는 기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직장일, 학업, 사업, 목회, 살림, 알바일지라도 그 일에 최선을 다할 때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