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에 나는 누군가 내 길을 결정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결정하시고 인도하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대학도, 학과도, 직장도, 결혼 상대자도 하나님이 딱딱 내게 맞게 결정해주시면 시행착오도 없고 얼마나 안전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시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 바울을 인도하시는 것을 보면 대단히 드라마틱하게 보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6~7) 하나님의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막으십니다.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지만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이유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막으셨는지도 자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연구한다는 것은 매우 무익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막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일행처럼 하나님께서는 막는 방법으로도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어떤 때는 이유를 알 수 있지만 당장은 알 수 없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코로나19가 왜 우리에게 오게 되어서 지금 우리의 삶을 막고 있는지 잘 모습니다. 물론 인간의 교만과 방종에 대한 경고이며,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믿는 자들에게는 더욱 하나님께 든든하게 뿌리 내리도록 하시려는 뜻이라고 생각은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명확한 뜻을 아직은 잘 모릅니다. 무엇보다 지금 사태로 낙심, 원망만 할 것이 아니라 지혜를 모으며, 할 바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 일행은 매우 답답했을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복음 전도자들에게 복음의 길이 막히는 것은 제일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방이 막히면 하늘 길을 열어서라도 길을 내주십니다. 육지 길이 막히면 바닷길을 열어서라도 길을 내십니다. 하나님은 바울 일행을 뱃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서 결국 서쪽 드로아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환상을 봅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9~10) 바울에게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서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환상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환상을 보자 즉시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씁니다. 순종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부르신 줄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각해보지 않은 뱃길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믿었습니다. 동쪽에서 와서 남쪽으로 가고자 했으나 막혔고, 북쪽으로 가려고 했으나 막혔습니다. 결국은 배를 타고 서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바울 일행은 더욱 어려운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바울을 통해서 유럽 선교의 문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이 사건은 세계 선교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북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 오세아니아에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하지는 시작이었습니다. 만약 바울 일행이 인도하심을 무시하고 계속 북쪽으로 갔다면 근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지역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유럽과 문화 중심지인 로마와 아테네는 더욱 멀어지게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긍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경적인 것, 합리적인 것, 개인적인 것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사건과 자신의 생각을 가족과 믿음의 형제들과 나눔으로써 공통적 의견에 도달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이성적, 합리적, 환경적, 공동체적으로 다양하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깨닫고, 이해하고, 알아가는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 시대는 신약성경이 아직 없었기에 좀 더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와 환상이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상을 부러워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환상이나 꿈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은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서 깨닫고, 생각나게 하고, 평안하게 하고, 알게 하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 66권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신 것처럼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시대와 상황에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을 사람을 살리고 힘을 주는 생명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길 원하실까요? 우리가 그것을 인정할만한 탁월한 권세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없으면 일이 안 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 하실 뿐입니다.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와 함께 일을 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면 우리에게 그것으로 인해 누리는 기쁨과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행복을 경험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남편을 남편으로, 아내를 아내로, 부모를 부모로, 사장을 사장으로, 목사를 목사로,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해야 평안하고 즐겁고 살만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면 행복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