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리슨 포드가 주연한 ‘도망자’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주인공이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때까지 필사적으로 도망 다니는 이야기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아내를 죽인 진짜 살인자를 찾아다니는 것이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누명을 뒤집어 쓴 채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도망 다녀야 했으니 그 사람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성경에도 십 수 년을 도망 다니면서 지내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의 자리를 넘본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죄도 없이 광야로, 동굴로, 망명지로 피해 다녀야 했던 다윗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칼과 창을 피해서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심지어 적국인 블레셋 땅으로 도망을 가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곳의 왕과 신하들이 다윗을 수상하게 여겼고 목숨의 위협을 느끼던 다윗은 미친 체를 하면서 위기를 벗어나기도 했습니다. 십 여 년을 그렇게 도망 다녀야 했던 다윗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다윗은 위험을 피해서 아둘람이라는 굴로 도망을 해서 지내게 됩니다. 다윗의 가족들과 여러 사람들이 아둘람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모여든 사람들을 보니까 다 어려운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삼상22:1~2) 환난을 당했다는 것은 가난과 폭력과 핍박으로 어려움을 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혹은 부모를 잃거나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빚진 자는 말 그대로 빚에 눌렸거나 빌려주었다가 받지 못해서 어려움을 당하거나 아니면 빚을 갚을 수 없어서 도망쳐 온 사람들일 것입니다. 마음이 원통한 자들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거나, 장애가 있거나 고아와 과부라고 놀림과 조롱과 핍박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함께 한 사람들이 무려 400명이나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모여 든 사람들은 상처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상처 받은 사람들 사 백 명이 모였는데 과연 어땠을까요? 서로 싸우고 상처주고 주는 것보다 받으려고만 하지 않았을까요? 웬만한 사람 아니고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닐까요? 다윗도 힘들고 어려울텐데 상처 받고 힘들고 고통당한 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다윗에게는 상처받아 슬프고 아픈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넉넉함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 왕은 도엑이라는 신하를 통해서 아비멜렉 대제사장이 다윗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울은 아비멜렉을 포함해서 제사장들을 다 몰살하라고 명령하였고 극악한 도엑은 팔십오 명의 제사장들을 죽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사장의 아들 중 한 사람인 아비아달이 아둘람 굴로 도망하여 다윗에게 이르게 됩니다. 다윗은 구사일생으로 도망 온 아비아달에게 말합니다.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22~23절)
다윗을 그렇게 넉넉하고 큰 사람으로 만든 것은 바로 광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원망과 불평보다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도망자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이 만들고 함께 했던 아둘람 공동체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니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그 안에는 다툼과 갈등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둘람 공동체가 깨지고 분열되었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숫자는 더 늘어났고 후에 다윗을 돕는 용사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아둘람 굴 안에 모여들었던 가난하고 외롭고 억울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다윗과 함께 하면서 치유되고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둘람 굴 안에서 다윗과 함께 미래를 꿈꾸면서 살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레위인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특히 절기에는 의무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신16:14~15)
교회는 나, 가족, 나그네, 고아, 과부, 레위인들이 함께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환난 당한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와서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무엇보다도 말씀과 기도를 바탕으로 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와 전도와 구제와 교제와 봉사와 교육이 균형 잡히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광염교회의 담임목사인 나도 아둘람 공동체를 꿈꾸어봅니다. 누구든지 와서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곳, 그래서 다시 세상으로 나가서 힘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을 꿈꿉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함께 아둘람을 꿈꾸어보시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