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전철에 앉아있는데 여든이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앞으로 오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운전하는데 30분 이상이나 밀리는 길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차 한 대가 끼어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공적마스크를 사려고 한참 줄 섰는데 할머니 한 분이 먼저 사겠다고 끼어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신의 것을 지켜야 한다는 ‘사수’(死守)와 더 어려운 사람을 배려해주는 ‘양보’(讓步) 사이에서 누구든 고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고 결정하려는 이기심을 조심해야 합니다. 대화, 공감, 배려하면서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그러한 덕목과 소양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까? 당신이 목숨이라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생명, 가족, 사랑 등 사람마다 본인이 생각하는 반드시 사수하고 싶은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도 반드시 사수해야 할 진리와 상황에 따라 양보해야 할 사안들이 구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유대인 중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게 된 이방인들이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믿음이면 된다는 자들과의 뜨거운 다툼과 변론이 생겼습니다. 그때에 예수의 제자 베드로는 “믿음으로 그들(이방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15:9~11)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이 반드시 지켜야 할 진리라고 확실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의 증표인 할례를 이방인들도 행해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야고보가 일어나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행15:19~20) 야고보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숭배, 음행, 목매어 죽인 것과 피 채는 먹지 말게 하자고 제안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은혜로 구원받는 진리를 지키면서, 또한 이방인들이 그래도 지켜야 할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야고보의 제안을 좋게 여기고 그 안대로 결의하게 됩니다. 야고보의 지혜로운 제안으로 인해서 진리는 사수하고 형식은 양보하게 됩니다. 복음의 진정성이 훼손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에도 부합되는 결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받아 들여질만한 흡족한 결정이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이것은 옳으니까 이렇게 해!’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삶에 이렇게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생각만 하고, 협상하지 않고, 직진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저런 것들을 살필 수 있는 정치력이 중요한 자질입니다. 사수와 양보를 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에 속에도 그런 비슷한 일들이 자주 있었습니다. 에베소에 아데미 여신의 큰 신전이 로마의 국교가 기독교로 되면서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그 건물을 존립시키면서 마리아 헌당 교회로 전환했습니다. 부활절을 뜻하는 영어단어 ‘이스터’도 여신 이름인 아스타르테와 이슈타르에서 기원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당시 로마의 축제 ‘농신제’의 영향을 받아 4세기 중반부터 12월 25일로 제정되었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17장에 ‘알지 못했던 신’을 언급하면서 아테네 사람들에게 유연하게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예수는 하나님이다’ ‘예수는 유일한 구원자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성경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우리가 양보해야 할 형식도 많습니다. 가정에서 가정예배를 수요일로 정했는데 수요일에 드리지 못했다면 어떻게 할까요? 밤12시라도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다른 날짜로 옮겨야 할까요? 유연하게 옮길 수 있습니다. 성경쓰기를 일주일에 한 장씩 쓰기로 했는데 자녀가 못했다면 어떻게 할까요? 다른 날에 쓸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도와주면 좋겠지요. ‘동네에서 함께 결정하기를 눈 내리면 자기 집 앞에 쌓인 눈은 아침에 치우기로 했는데, 옆집에서 오전10시가 지나도록 안 치우고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릇들이 원래 있었던 자리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으면 어떻게 할까요? 민망하게 손을 휘저으면서 찬양하거나 소리치면서 찬양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코로나19로 인해서 예배당에 다 같이 모여서 예배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할까요? 화장을 진하게 한다면, 민낯으로 다닌다면, 바지만 입는다면, 치마만 입는다면 등등.
정말 중요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진리는 사수하고 본질이 아닌 형식은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사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