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일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며 자기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래서 이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종려주일부터 부활하시기까지의 한 주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고난을 겪으십니다. 첫 번째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버림받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마27:12)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거나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내가 다시 세우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진실을 알지 못하여 당혹해하면서 죽이려고 모의를 하고, 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하여 심문을 받게 했습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마27:22) 이스라엘 백성은 빌라도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백성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환영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길에 겉옷을 깔고, 승리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호산나 곧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며 괴성을 질렀습니다. 그들이 돌변한 이유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선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로마 통치로부터 자유를 줄 것이라는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 하니 자신에게 지금보다 나은 삶을 주지 않을까 하는 정치적이고 육체적인 ‘구원’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진정한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는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로마 황제로부터 임명을 받아 유다 지역을 통치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죄와 사면 및 선고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난 뒤 그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18:38) 그래서 처음에는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난 군중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흉악범이었던 죄수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민란을 일으킬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내립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존재인지를 알지 못한 채 사람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이스라엘 백성’, ‘빌라도’에게 버림받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채찍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에 이르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버림받고 고난당할 것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신 예수님이 피조물인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했습니다. 심지어 죽음을 당한다니 말이 되나요? 사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그런 일을 당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고난을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버림받는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어둠의 권세인 사망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성육신’, ‘고난’, ‘십자가에서 죽으심’, ‘무덤에 들어가심’ 모두 예수님의 낮아지심, 즉 비하입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곧 그의 강생하심인데 또한 비천한 지위에서 나셔서 율법 아래 복종하시고, 금생에 여러 가지 비참함과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받으시고 묻히셔서 얼마 동안 죽음의 권세 아래 거하신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7문>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비하 덕분에 비참한 죄인임에도 ‘완전한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우리의 죄가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예수님의 은혜는 더욱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를 바라보면 볼수록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은혜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스스로를 바라보면 죄인임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뿐이지만, 십자가를 통해 나를 바라보면 결국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의인이 되었음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비하뿐만 아니라 부활의 기쁨까지 나아갔으면 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