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느 나라로 여행을 가고 싶은가요? 혹은 살고 싶은 나라가 있나요? 나름대로 가고 싶거나 동경하는 나라가 있어서 가보고 싶다거나 한 번쯤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소천하신 아버지는 고향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으셨습니다. 어디 가고 싶으시냐고 물어보면 ‘춘포면 석탄리’라고 아버지가 살던 고향 주소를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천국에 보내드리고 성도들 가정의 장례식을 몇 차례 치루면서 천국에 대한 생각을 더 하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성경은 천국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22:1~5) 천국의 묘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하나님의 보좌와 생명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은 하나님이 비추시기 때문에 다른 빛이 필요 없는 곳이며 밤과 저주가 없는 곳입니다. 천국의 백성 된 자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영원히 왕으로서 다스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천국은 완벽하게 아름답고 영원한 곳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삶은 천국에 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한 것인가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천국의 백성이지만 아직 완전한 천국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미리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는 생명력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생명력 있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안타까운 죽음과 저주 가운데서 살고 있는 가족과 친지와 이웃들에게 생명을 흘려보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생명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흘려보내며 돕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면서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말과 기도로 세상 나라와 사회 분야들과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주시는 능력으로 자신의 죄성과 악함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를 때는 죄에 쉽게 넘어지고 실패했었다면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자신의 죄성과 인생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얼마나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땅의 삶을 비관하고 외면하면서 세상을 빨리 떠나고 천국만을 고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삶이 너무 즐겁고 좋아서 세상에서 천 년 만 년 살고 싶어하고 있습니까?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면서 가난하고 살기 어려운 시절에는 믿는 사람들이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를 많이 외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지요? ‘주 예수여 내가 하고 싶은 것 다해보고 나중에 오시옵소서’라고 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봅니다. 물론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며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천국을 살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천국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 이렇게 고백하며 시작했으면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함께 합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순간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예수님께 여쭈면서 살면 좋겠습니다. 그럼 죽어서만이 아니라 살아서도 우리는 천국의 백성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