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에 이단의 폐해에 대해서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자신을 메시아라고 하면서 신격화해서 온갖 몹쓸 죄를 저지르는 이단 사이비 교주들이 있습니다. 과대망상에 빠져 있거나 사단에게 속아서 악한 짓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복음을 더욱 견고히 지키면서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대 교회 시절에도 이단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특히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가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영으로만 오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육체와 물질은 악하고 타락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육체로 죄를 범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도 괜찮다고 주장했습니다. 영적인 것은 선하고 옳은 것이라고 하면서 영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는 불균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 거짓 교사들은 성도를 찾아다니면서 잘못된 가르침으로 미혹해서 방종한 삶을 살며,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부추겼습니다.
야고보의 형제 유다는 악한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한 모습이나 활동이 이미 오래 전부터 예언되어 왔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1:3~4) 유다는 교회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항하여 힘껏 싸워야 하며, 미혹을 받게 될 때 복음의 진리 가운데서 영적 성숙을 이루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자, 육에 속한 자, 성령이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진리와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긍휼을 기다릴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1:20~21) 교회 공동체가 거짓 교사들에 의해서 흔들리는 것을 본 유다는 헌신된 성도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에 열중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을 성령으로 기도하면서 다시금 세울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려는 우리에게 악한 영향을 주는 요인들이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이단과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들은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교회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며 예수님 오실 그 날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영육간에 성숙해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진리 안에서 꾸준하게 성장해야 합니다.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고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받아서 그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며, 구원의 날까지 예수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자연스레 흘려보내게 됩니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며 불에서 끌어내며, 죄를 미워하지만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이처럼 유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받아서 흘려보내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긍정적 기제로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사람을 지탱하고 세우는 근원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며 말하는 이유는 사실은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를 언어로 표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제대로 실천되고 작용될 때 사람은 설득이 되고 변화됩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논리로만 설득이 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의 마음으로 그 사랑의 온기를 나누는 게 예수님을 전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말과 언어와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어야 하겠지만 결국은 사랑의 실천과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긍휼을 나누게 되면 논리나 말에 반응하지 않던 이들조차 예수님을 떠올릴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은 사랑에 반드시 반응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과 긍휼로 사람을 대하여야 합니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1:22~23)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받아서 그 사랑과 긍휼을 흘려보냅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