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맛과 쓴 맛의 말씀을 느끼십니까?/계시록강해

by 김세열 posted Apr 3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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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는 쓰나 입에는 단 말씀 
계시록 10:1-11

여러분중에 천사의 모습을 실제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천사를 그리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그리겠습니까? 보지 않아도 대개 예쁘고 아름다운 얼굴을 그리려고 애쓸 것이며 아마 작은 아기 천사로 그릴 것입니다. 마음은 착하나 힘은 연약하여 검은 사탄과 팔씨름을 하면 백발백중 지는 그런 미동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거의 모두가 흰옷을 입힐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길고 큰 깃털로 된 등 뒤의 두 개의 날개를 그릴 것이며 머리에 빛나고 둥근 원형의 후광을 그릴 것입니다. 조금 더 센스있는 사람은 트럼펫처럼 만들어진 금나팔을 부는 모습을 그릴 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머리속에 만화나 그림속에서 새겨진 착하고 예쁜 천사의 이미지입니다.

본문의 시기적 상황은 종말에 있을 여섯 번째 나팔의 재앙이 지난 후 곧이어 닥칠 7곱째 나팔재앙이 남아 있는 때입니다. 이 때 요한은 하늘에서 한 천사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천사는 우리의 상상과 달리 힘이 없는 연약해 보이는 모습의 천사가 아니었습니다. 작은 아기천사도 아니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아주 힘세고 거대하고 강력한 천사였습니다. 그 천사의 모습은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그 천사는 구름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신적 영광으로 나타남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현현과 그리스도의 재림에도 구름이 등장합니다. 그의 직분은 영광된 직분임에 틀림없습니다. 천사의 얼굴은 해처럼 환히 빛나는 모습이었는데 이도 하늘의 거룩함과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는 모습이 되길 축복합니다. 그것은 수술하고 화장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은혜 충만할 때 나오는 얼굴입니다.

천사의 머리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있었습니다. 무지개는 노아에게 주
신 무지개처럼 자비와 긍휼을 베풀겠다는 언약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이 천사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비와 긍휼로 인도하는  선한 천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발은 붉고 환히 타는 불기둥같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견고함과 심판의 확실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모습입니다.

그는 엄청난 크기의 천사였는지라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았다고 했습니다. 지구를 커다란 지구본처럼 태평양과 아시아를 밟고 있는 천사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사자의 부르짖는 큰 소리처럼 "우르릉 "우레를 외치는 소리를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천사의 모습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천사가 오른 발로 바다를 왼발로는 땅을 밟고 있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성경에서 발로 누르는 것은 승리자의 패배자에 향한 완전한 소유의 모습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세상과 우리 자신이 어떤 인간들에게 속한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돈과 권력에 눌려 살다보면 이 세상의 재산가나 정치가들의 손에 좌우된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자기는 회사의 사장에 의해서 상사에게 속한 자처럼 초라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각 나라의 정부가 다스리는 곳이 아닙니다.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의 지도자가 다스리는 곳도 아닙니다. 전세계의 카톨릭의 교황도 아니며 종교지도자가 통치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온 세계를 밟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능력으로 다스리십니다. 그것은 국제 문제나 국내 문제뿐아니라 개인의 사소한 생활 문제까지도 포함됩니다. 내 남편과 내 아이들의 문제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직장의 일과 생계문제와 인간관계의 모든 갈등까지도 주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두려움과 의심과 불안에 잠겨 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결핍으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그 분께 내어 놓으시기 바랍니다.삶의 문제도 내놓으시 바랍니다. 아무리 큰 문제라도 그분에게는 작은 문제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의 천사과 땅과 바다를 밟고 서 있습니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문제라도 그분은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긍휼과 자비의 천사를 보내신 분입니다.

요한은 그 천사가 외칠 때에 일곱우뢰, 즉 7번의 천둥소리와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우르릉 쾅 하는 의미없는 우레 소리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소리는 의미가 있고 내용이 담긴 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그 내용을 알아들었고 기록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요한을 향하여 소리가 났습니다.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왜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우레의 내용을 기록하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늘에 속한 비밀스런 것을 알려주는데 이것을 드러낸다는 뜻의 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십니다. 즉 자연의 모든 섭리, 천체의 크기와 조화를 통해,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크심을 나타냅니다. 그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하나님의 지혜가 무한함을 보여줍니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을 자연계시입니다. 그러나 자연계시만으로 인간은 구원을 얻기에 부족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에 관하여 특별한 일들을 그것들은 꿈이나 환상이나 기적 또는 특별한 예언의 말씀으로 주시는데 이를 특별계시라고 합니다. 그 중에 가장 특별한 계시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이 성경안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구원을 시작하셨고 어떻게 역사를 진행하시며 어떻게 구원을 완성할 것인지를 기록해놓았고 인간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지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말씀이 진리이지만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삼위일체인 것에 대해서 인간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란 것도 인간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교리중에 하나입니다. 태어나기 전에 창세전에 선택하고 유기하였다는 것도 인간은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지 못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성경안에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기록해 놓은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이 언제 완성되는 지는 비밀로 해놓으셨습니다.  또한 누구를 구원하는지 누구를 버리시는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숨기시면 우리 인간들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 너무 신비로와서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신명기 29:29절에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계시해 주신 것은 우리가 알고 깨닫기를 위함이지 모르고 살도록 하신 것은 아닙니다. 성경책은 베개로 주신 것도 아니며 주일 날만 잠깐 보는 책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숨기신 것을 억지로 알려고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오묘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다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 의인이 악인보다 더 고난을 당하여야 하는지, 왜 불의가 판을 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원망이나 불평하는 자가 되도록 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함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곱우뢰의 내용도 하나님이 비밀에 두신 것을 이상히 여기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숨기신 것을 억지로 알려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기독교가 반지성주의는 아닙니다. 반문화도 아닙니다. 가르쳐주신 것은 열심히 깨닫고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알려주시지 않은 것들은 알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겸손과 신뢰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내주신 말씀만을 이해하기도 인생이 부족합니다. 가르쳐주신 것은 열심히 배워서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며 살면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이처럼 평안한 인생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 천사는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6절 끝에 보면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하나님의 비밀이란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즉 죄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에 대한 구원의 완성을 내용으로 하는 역사의 종말입니다. 그리고 새하늘과 새 땅의 나라의 비밀입니다.  이 비밀은 선지자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예언되었던 것입니다. 이 천사는 일곱째 천사의 나팔과 함께 지체하지 않고 이루겠다는 맹세를 합니다. 일곱째 나팔은 바로 일곱 대접의 재앙입니다. 이것은 바로 마지막 재앙이며 심판입니다. 이제 정말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질 마지막 시기가 지체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퀴즈 프로그램중에 문제마다 상금 또는 세탁기 냉장고등을 걸고 하는 퀴즈쇼가 있습니다. 문제가 점점 어려워질수록 상금 또는 상품이 커집니다. 그래서 쉬운 문제를 여러개 맞추는 것보다 어려운 문제를 맞추면 상금이 크게 되어있습니다.

어렸을 때 외국 코미디인 왈가닥 루우시라는 드라마의 어떤 장면이 희미하게 생각이 납니다. 루우시 부부가 상금을 걸고하는 퀴즈쇼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루우시라는 아내는 쉬운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틀려서 웃음을 자아냅니다. 정답을 알지만 아내의 실수로 틀리는 남편은 속이 타서 화가 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제는 가장 상금이 많고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문제는 어는 유명한 자의 죽음시의 유언이 무엇이었느냐는 문제였는데 보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루우시는 결정적으로 부저를 눌러버립니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는데 시간이 다되어 갑니다. 절망한 남편은 루우시에게 말합니다.
"여보 이제 다 틀렸어 난 먼저 가겠어. , 루우시가 대답합니다. 안돼요 여보 아직 가지말아요. 아직도 기회는 있어요."
이 말을 들은 사회자 "여보 난 먼저 가겠어, 안돼요 아직 가지 말아요 기회는 있어요......네 정답입니다. 이 상금은 루우시에게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수수께끼 해보셨지요? 이런 수수께기가 나왔다고 합시다.
이 세상이 끝나면 어떻게 됩니까? 의인과 악인은 어떻게 됩니까? 새하늘과 새땅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여러분에게는 너무 쉬운 문제입니다. 결코 비밀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올바르게 맞추는 세상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들은 세상사람들에게 감춰진 비밀에 속하는 영역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철학박사나 퀴즈박사도 이 비밀을 알지 못한 채 살다가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앞으로도 죽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비밀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의인의 구원과 죄인의 심판으로 절정을 이루는 것이 비밀입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죽어 심판에 이르는 것이 비밀이며 의인은 영생의 부활로 죄인은 영벌의 부활로 나타나는 것은 정말 알 수 없는 비밀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이제까지 수많은 문제들을 틀리고 실패하였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제까지 총 시험본 것들의 문제들중에 틀린 것과 맞은 것을 합치면 틀린 것이 더 많을 수도 잇습니다. 인생의 시험도 우리는 많이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문제가 남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비밀을 아느냐인 것입니다. 그 비밀을 아는 것은  수십만불의 상금이 아니라 억만금을 주어도 살 수 없는 영생의 상을 얻는 것입니다. 비밀의 답을 아십니까?  이 비밀의 정답을 아는 자들은 복이 있을지어다. 그 감격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 환상을 보고 있는 요한에게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음성은 바로 하나님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놓인 책을 가지라"
요한이 천사에게 책을 달라하니 그 천사는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천사에게 나아가서 그 책을 받아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다 먹은 후에는 쓰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 책은 무슨 책이길래 먹으라고 하실까요?
어떤 사람이 공부하던 이야기를 들었는데 매일 영어사전을 한 장씩 완전히 암기한 후 그것을 씹어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실제로 씹어먹는다고 그 사전의 내용이 소화되어 숙련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먹는 것은 완전히 소화시키고 이해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먹어야 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하필 떡으로 비유하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도 떡처럼 먹어 영양분을 섭취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맛있는 요리가 있더라도 그것을 입에서 먹어 소화시키고 그 재료가 가진 모든 영양분을 완전히 흡수하여 온몸에 골고루 분배하기 까지는 그 요리는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먹지 않는 요리라면 요리의 목적을 상실하는 것입니다.그 요리는 결코 그 사람에게 영양가를 공급하지 못하고 그의 육체를 성장시키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도 듣고 이해한 후 삶에서 적용하고 실천해야만 그의 영혼을 성장시킬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부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약속들을 들을 때에 감동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죄용서와 구원을 생각하면 찬양과 감사가 울려납니까? 그래서 고난과 환란중에서라도 기도하면 은혜의 눈물이 나옵니까? 아니면 이미 구원의 은혜를 다 알고 있지만 메마른 지식처럼 아무런 감동이 나없습니까? 복음의 진리들이 더 이상 우리의 마음에 꿀송이 처럼 달지도 않고 따분한 교리처럼 여겨지십니까? 선택과 소명과 중생과 칭의와 양자됨과 영화의 복음을 들어도 그 진리들이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양심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먹을 때에 그 말씀이 입에 꿀송이처럼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감사와 기쁨으로 나타나게 되어야 잘 먹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을 변화시켜서 찬양으로 나타나야 잘 먹은 말씀입니다. 꿀송이처럼 느끼며 먹으면 우리의 입술이 복음의 비밀을 전하는 입술이 되게 하고 우리의 언어가 바뀌고 안색이 바뀌고 삶의 자세가 변화됩니다.

그런데 왜 말씀이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다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영의 양식이므로 달고 오묘합니다. 속죄와 칭의가 얼마나 은혜롭고 단 말씀입니까? 영광과 천국의 소망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주의 말씀이 어찌 그리 단지요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말합니다.
비진리가 진리처럼 혼탁한 세상에서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요 사람에게 달고 심오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받은 그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를 죽이고 십자가의 삶을 요구합니다. 죄와의 싸움을 말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구석 구석 비추어보면서 어두운 부분들을 잘라내도록 요청합니다. 늘 자아를 부정하는 싸움을 살게 합니다. 그것은 고통입니다. 쓴맛입니다.
또한 말씀을 전할 때에 쓴맛을 경험합니다. 사도 요한이 그 말씀을 죄악된 사람들과 현실로 나갈 때는 그것이 보통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죄인들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는 성부께서도 탄식하시고 예수님께서도 울면서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파멸로 달려가는 예루살렘을 보면서 고통을 느끼며 울며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복음은 전할 때의 핍박과 조롱을 감수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에 대하여 무서운 심판을 선언합니다. 지옥형벌을 경고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회개하고 주앞에 무릎꿇는 결단을 요청합니다. 사도요한은 세상을 향해 대환란과 최후 심판을 경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은 근심과 고통을 수반하는 내용이요 듣는 자에게는 반감과 핍박을 감수해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불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은 기쁨이지만 끝내 거절하는 그들에게 심판과 재앙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고통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배에서는 쓴 것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여러분 이제 하나님의 말씀은 달지만 우리 배에는 쓴 고통의 말씀이란 뜻을 아시겠습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고 마치겠습니까?
여러분은 복음의 단 맛을 아십니까? 복음의 쓴맛을 아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맛과 쓴맛을 느껴야 합니다. 무감각은 죽은 자들이 갖는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으로 인해 기쁨과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꿀처럼 단 맛을 느끼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말씀으로 살 때에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와 싸우며 이겨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게 될 때에는 불신자에 대한 애가 끓는 심정을 가져야합니다. 사랑하는 자가 불신으로 인해 심판으로 지옥의 영벌에 떨어지는 것을 진심으로 아는 자가 어찌 마음이 평안하고 마냥 아무런 일도 없듯이 그들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들은 복음의 쓴 맛입니다.

말씀에서 단맛과 쓴맛을 느끼는 것은 사도 요한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자들의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의 사명이었습니다. 고통스럽고 쓴 말씀을 수많은 사람에게 예언하는 것이 사명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가족이나 친적중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친하게 지내는 이웃이나 친구들중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의 기쁨을 전하십시오. 그들에게 삶을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말씀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십시오. 말씀을 증거하는 일은 우리의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해야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그 사명에는 직분이나 신앙정도나 지식정도나 차별이 없고 예외가 없습니다. 은혜받은 자 모두가 받은 사명입니다. 이시간 기도로서 단맛과 쓴맛을 체험합시다. 구원을 위해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