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서기만 잘해도 거저 행복합니다.

by 김세열 posted Jun 0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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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14:1-20절

드디어 월드컵이 개막되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올해 월드컵이 몇 회째인지 아십니까? 월드컵이 언
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아십니까? 1930년 우르과이 대회를 시작으로 했다고 하고 이번이  17회입니다. 
이제 모레면 한국도 화요일 8시 30분에 폴란드와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첫경기를 할 것입니
다.  짝짝 짝짝 짝 대한민국! 외치는 소리가 경기장의 붉은 옷을 입은 응원단과 온 나라가 응원가를 목
청것 소리지르며 노래하며 고함치며 떠뜰석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 경기장의 수용인원은 55982명이라
고 합니다. 입장료가 수십만원씩 하는데 왜 경기장을 찾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
를 들으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노래하며 고함치는 경기현장에 있어보면 그 흥분과 감동이란 집에
서 혼자 텔레비젼 보는 것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기쁨은 함께하면 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승리
한 나라는 온통 거리거리마다 국민들이 나와서 축제를 벌입니다. 그 모습이 세네갈 국민들의 축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난 해 우승팀이 프랑스가 처음 출전한 세네갈에게 패배했습니다. 경기전에 이
싸움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라고 비유했습니다. 누가 그렇게 비유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비유했으
니 세네갈이 이긴 것입니다. 골리앗은 영원히 다윗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를 이긴 세네갈
은 대통령도 거리로 나오고 관공서와 학교는 휴교를 하고 거리거리에서 승리의 축제를 벌였다고 합니
다.

만일 한국도 이번 월드컵에서 첫승을 하거나  16강에 들어가는 승리가 있는 날엔 온 국민들이 들떠
서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축제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기쁜 일은 모여서 서로 나눌 때에 기
쁨이 더욱 상승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슬픔은 함께 모여서 나누면 점점 하강되어 작아집니다.

오늘 14장의 환상은 12 13장의 환상과는 180도 급변한 모습입니다. 그 모습은 월드컵 우승한 나라
의 백성들의 그것처럼 더 높은 기쁨과 감격의 현장이 나옵니다.
12장 13장은 무시무시한 사단이 출현하였습니다. 12장엔 일곱머리를 가지고 10뿔을 가진 붉은 용
이 나왔습니다. 그 붉은 용은 여자를 죽이고 여자의 아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것이 실패하자 하나님
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위에 섰더라는 것으로 마칩니
다. 13장에는 사단의 하수인인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땅에서 나온 짐승이 등장합니다. 이 둘은 사단에
게서 받은 권세를 가지고 용을 경배하게 하며 하나님과 성도들을 훼방합니다. 그리고 성도들과 싸워
이기고서 성도들을 사로잡거나 죽입니다. 땅에서 나온 짐승은 어린 양처럼 생겼지만 용의말을 하면서
불이 내리는 것 같은 이적을 행하면서 성도들을 미혹합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에게 경배하
게 하며, 만약 경배하지 않는 자는 다 죽이고 매매하지 못하게 하는 핍박을 가하였습니다.

이 환상까지 본 요한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첫째는 두려움입니다. 사단의 공격이 이렇게 무시무
시하고 집요하며 강력할줄이야 하면서 놀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성도들에 대
한 안타까움으로 응원하는 마음입니다. 제발 그 핍박이 거세고 미혹이 교활하다고 할지라도 인내하고
믿음을 꼭 지켜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요한은 이제 14장의 환상을 열었습니다. 요한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어린 양이었
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앞에서 어린 양을 본 적이 있습니다.
5:6절에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우리는 어린 양이라고 할 때에 연약하고 순한 짐승을 떠올립니다. 그것은 양이라고 하는 짐승의 성
격과 특징을 비유하여 예수님을 연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양이란 짐승의 특징이 아니라 구약적
제사를 알아야 바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양의 속성이 아니라 속제 제물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
죄를 위해 죽으신 어린양 그러나 다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한
은 부활하신 그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시온산위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2장에서는 일곱머
리 10뿔의 붉은 용이 바다의 모래 위에 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제 시온산에 서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어린 양이 먼저 보였을 까요? 시온 산이 먼저 보였을까요? 별로 중
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서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시온산일까요? 이스라엘에 자주등장하는 유명한 산들이 많이 있습니다. 헐몬산은 높은
산이며 늘 이슬이 있고 눈이 있어서 요단강의 수원지가 되는 산입니다. 예수님이 변화했던 변화산이라
고 추측된느 산입니다. 또 에발산은 그렇다고 쳐도 그리심산은 가장 수목이 울창하고 축복된 산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복을 선포한 산입니다. 엘리야에게 하늘의 불이 내렸던 갈멜산도 주님이 서있다면 얼
마나 능력있어 보입니까?  예수님이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했던 감람산에 서 계시면 좋지 않습
니까?
시온산이 어디입니까? 우리가 복음성가를 부를 때 시온에 관한 가사가 많이 있습니다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상의 기쁨 저 북방에 있는 시온산 큰 왕의 성일세"
찬송가 248장에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오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쳐오네
그 산은 바로 높지도 않지만 예루살렘성이 있는 언덕을 말합니다. 그럼 요한은 예루살렘 성이 있고
성전이 있었던 그 시온산을 보았을 까요? 정말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영광중에 회복되고 왕으로 오실
예수님으로 인해 온 구원받은 백성들이 그곳에 모여 즐거운 노래할 것을 바라보았을까요?
아닙니다. 요한은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진 것을 너무나 분명히
보았습니다. 요한에게 시온산은 이제 문자적인 지명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대한 상징으로 쓰인 것입니
다. 그것은 히브리서가 말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히
12;22)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온산이 문자적인 지명이라면 히브리서의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시
온산에 왔다는 것인데 받아들일 수 없는 해석입니다. 따라서 시온산은 바로 믿음으로 인내한 백성들이
최후로 도달하는 장소를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즉 따라서 시온산은 승리의 산입니다. 시온산은
영광을 뜻하는 산입니다. 그 시온산에 어린 양이 서 있습니다. 바로 어린 양 예수가 승리했기 때문입니
다. 어린 양 예수께서 죽었으나 다시 사셔서 사망권세를 꺾으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영광을 받으
셨습니다. 그래서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서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서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와 영광의 자리에 서셨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복된 소식이 있습니다.  어린 양 혼자 있지 않습니다. 혼자 죽으셨다 살아나셨지만, 혼자
승리와 영광을 받지 않습니다. 함께 14만 4천의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담의 원죄를 배운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불평스럽게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담 때문에 죄인이
되었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게 되었다는 성경의 진리를 말할 때에 항변합니다.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죄인으로 태어나 죄를 지었지만 억울합니다. 내가 지은 죄값은 받겠지만 아담이 지은 죄값
을 담당하는 것은 억울합니다. " 그런 분들은 우리는 반대로 우리가 하지 않은 의를 얻는 다는 사실
을 간과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행하지 않은 죽음을 예수님으로 인해 죽었고 예수님 때문
에 부활하고 승리와 영광을 누립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예수 안에 있고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 뿐입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임전도사하면서 강도사 시절부터 아마 조목사님 따라 심방을 따라 다녔던 것
같습니다. 등록심방 이사심방 개업심방 돌 육순 결혼 장례 모든 심방을 따라 다녔는데 초기에는 심방
가는 것이 여간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어디 다녀보지도 못했는데 심방가면 교회에서 시간내줘 차내줘
경비대줘서 보내주니 공짜로 여행 다니는 것처럼 좋았습니다. 어디 부산이나 전남 해남처럼 멀리 장례
가 나면 은근히 더 신났습니다. 또 즐거운 것이 있는데 성도님들이 담임목사님 오셨다고 정성것 맛있
는 음식을 차려서 대접하는 것입니다. 저도 별로 넉넉한 형편에서 자란 것은 아니라 대학교 때까지도
먹고 싶은 반찬을 마음 것 먹는 것은 일년에 몇번 될까 말까했습니다. 그런데 심방때 마다 맛있는 반
찬을 차려주니 실컷먹습니다. 그덕에 87킬로까지 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얼마동안 심방다니면서 깨달
은 것이 있는데 먹을 때도  있습니다. 가능하면 조목사님과 같은 상에 함께 앉으라입니다. 일행이 많
아서 상이 여러 개 나와도 조목사님 상에는 고기덩어리 하나라도 더 오고, 더 빨리 나옵니다. 같은 과
일이 나와도 더 달고 실한 것이 올려집니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좋게...입니다..무슨 올림픽 표어같습
니다만 담임목사님을 향한 성도들의 대접하는 마음이 그렇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당연하고 좋게 보여집니다. 그 때 깨달은 진리가 있습니다. 인생에는 줄이 있는데 줄을 잘 서야하느니
라. 

체육대회에 청팀과 백팀이 있습니다. 내가 못해도 우리 팀이 잘하면 나는 덩달아 우승하는 것입니
다. 나는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우승할 팀에 소속된 것을 지키고 남아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도 두 줄이 있습니다. 짐승편에 함께 서는가? 아니면 어린 양과 함께 서는가?입니다. 사
단과 함께 있으면 그는 사단과 함께 멸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함께 승리합니다.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더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더 의로운 행위를 한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믿은 것도 아니라고 가르쳐 줍니다. 믿음은 값없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대부분의 세상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똑똑한 것도 아니며, 그들이 다른 사
람보다 더 착했거나 도덕군자도 결코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그중에는 더 악하고 더 비열하고 더 잔인
한 자도 있으며 여러명을 중인 살인강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결코 더 잘난 것도 없습니다.
단 잘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그들 스스로 한 것은 아닐 수 있지만 그들 입장에서 그
래도 한 것이라면 줄서기를 잘했습니다. 주님의 뒷줄에 서서 핍박하고 유혹한다 할지라도 줄에서 이탈
않았습니다. 적어도 줄서려고 애를 썼습니다.

여러분! 줄 잘 서셨습니까? 잘 서셨습니다. 사단은 이제 그 줄을 흩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줄에 남아 있는 것은 생명줄입니다. 승리의 줄이며 영광의 줄에 서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줄에 서있는
한 어린양은 승리하실 것이고 그 구원과 승리를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두가지를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은 어린양과 함께 있는 자들이 14만 4천이라고 했습니
다. 왜 14만 4천이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14만 4천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
록되어 있었는데 이것의 의미는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문자적으로 14만 4천명을 말합니다. 14만 4천이란 숫자는 큰 완전수로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성도를 총칭하는 수입니다. 완전수인 3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4는 지상의 4 방위인데, 이
에 합인 7과 곱인 12를 완전수로 여깁니다. 여기에  12*12는 보다 완전수이며 거기에 *1000을 하면 아
주 큰 완전수가 됩니다.
따라서 이는 문자적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의 충만한 무리라고
여기시면 됩니다. 여러분은 모두 14만 4천명의 성도이며 시온산에 서게 될 분들이심을 믿으시기 바랍
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와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는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오른 손이나 이마에 666을 새긴 것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
제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이름을 이마에 새기지는 않기 때문에 이것도 상징으로 여겨야 합니다.

왜 이름을 새겨놓았을까요?
월드컵의 우승컵은 처음에는 줄리메컵이 있었는데 그것이 66년 잉글랜드에서 도난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74년 서독월드컵에 앞서 피파컵이 제작됐다고 합니다. 진품 FIFA컵은 국제축구연맹(FIFA)의
소유로 바뀌고 월드컵 대회 우승팀에는 실물보다 약간 작은 금 도금의 모조품을 주는 것으로 FIFA가
규칙을 변경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미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FIFA컵 밑바닥에는 역대 대회 우승국의
이름을 새겨넣는 17개의 명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올 17회의 마지막 우승국의 이름이 새겨 넣게 되고
새로운 컵을 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컵에 새겨진 그 나라의 이름의 의미는 그래도 
아마 그 컵에 대한 권리가 17개의 나라에 있음을 뜻하는 것일 것입니다.
우승하려면 월드컵 조별예선 3전에서 상위2팀에 들어야하고 본선토너먼트에서 4연승을 해야 합니
다. 이미 지역예선에서도 10차례이상의 전적을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랜기간 힘들게 승리해서 얻은
컵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는 것입니다. 아마 그 컵에 권한이 있음을 그 이름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백성에 이마에 그 이름을 새겨놓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14만 4
천명의 택한 자를 위해서 창세전부터 준비하고 그 아들 예수를 보내 죽이시고 성령을 통해 감동하여서
예수믿게 하고 위로하고 보호하며 놀라운 희생과 수고를 통해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의 승리를 이루게
하였다면 그 이마에 이름을 새겨넣는 것이 부족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름을 어디에 주로 사용합니까? 학창시절에 학용품에다 이름 쓴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소유하기 위해 그 사람에게 문신을 하고 흉터를 남기는 사람이 있습
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사람이 되게 하려고 결혼을 하고서 그녀 이름 위에 호주
로서 자기 이름을 새겨넣습니다. 소중한 물건일수록 자기 이름을 분명하게 새겨놓습니다. 땅문서 집문
서에 자기 이름을 새겨놓고 공증도 받습니다. 우리 비전하우스에 여 전도사님 의자를 새로 놓았는데
어느 여전도사님은 그 의자에 자기 이름을 적어 놓았습니다. 가능한 노터치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물건
을 아끼는 습관때문인데 어쨋든 그런 성격 때문에 비전하우스가 그나마 깨끗하고 사무용품이 필요하면 
그 분의 정리정돈덕에 불편없이 삽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승리의 우승컵입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존재입니다.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만이 여러분을 건드릴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하나님의 승리의 획득물입니다. 오랜기간동안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 사단에게서 구출해온 포로입니
다. 그래서 다시는 여러분을 잃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새겨넣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마에 이름을 새겨넣었습니다. 그것은 하나
님이 여러분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결코 다시는 빼앗기지 않겠다는 선언입
니다.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하는 분명한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그 분의 소유된 종입니
다. 내 뜻대로 내 맘대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노예입니다.
그러나 억눌리고 고통스런 노예도 아니며 종도 아닙니다. 안전한 노예입니다. 행복한 종입니다. 아
니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 분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만족하며 풍족하게 됩니다.  전능하신 그분의 보
호 때문에 우리는 더없이 안전하고 평안합니다. 누구도 우리를 해치거나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진정
행복하게 됩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옆에 분에게 말씀하세요 " 당신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군요. 당신은 행복자이십니다. "

또 요한은 많은 물소리 같고 뇌성같은 거문고 타는 듯한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이 14만 4천인이 하
나님의 보좌 앞에서 새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이 보기에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
럽히지 않고 정절이 있는 자같았습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가운
데 구속을 받아 처음열매가 되었으며 그 입에 거짓말과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십사만 사천의 성도중에 포함된 사실을 아십니까? 바로 예수를 믿는 여러분이 하나님
이 구원하신 자들이요 어린양의 보좌옆에 앉아 새노래를 부를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새노래는 새로운
복음성가나 찬송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사건후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그 구원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과거에 이런
구원은 있지도 않고 미래에도 다시 없는 온전한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것이
바로 새노래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심령으로 예수님의 구원을 감사하는 새노래를 부르시길 축복합니다.

이 사람들을 요한은 다음의 4가지 내용으로 설명합니다.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자입니다.  여자를 사단과 우상의 상징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보시
기에 구원받은 자는 더럽지 않은 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음 받았기 때문
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짓더라도 예수님은 그 피로 죄를 사하셨습니다. 죄의식은 있습니다. 그
러나 죄의 형벌은 사라집니다. 죄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우리가 마음껏 죄를 지어서는 안될 것입니
다. 왜냐하면 이미 정결하엿기 때문에 그에 맞는 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 순종하고 전적으
로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때로는 어린 양이 풀밭으로 가면 풀밭으로 가고 광야로 가면 광야로 가는
자들입니다. 즉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환란이나 손해되는 일도 감당
하고 나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남편에게 순종하라면 순종하는 것이며 아내를 사랑하라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면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 속한 자입니다.
구약에서 첫 열매는 하나님의 소유를 뜻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모든 이스라엘은 무엇이든지 처음
생기는 것을 마당히 하나님의 소유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입니다.
사단이거짓말만 하는 자임에 비해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사단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흠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의롭게 된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으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이며 더럽지 않고 깨끗하고 정결한 자이며 흠이 없는 자입니
다. 우리는 의롭게 되는 것이 전적으로 어린 양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한 죄 사함에서 되는 것입
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을 의롭게 보아주시고 여겨주심을 말
합니다.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죄인으로 여기시지 않고 정결한 신부요 흠없는 자로 여기십니
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여전히 죄의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죄에 얽매여 사는 자가
아니라 죄와 싸워 이기도록 노력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 방법은 성령님의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할
때에 더욱 이길 수 있습니다. 날마다 거룩해져 가는 삶이 성화이며 우리들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