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죽기 전에 아들들을 불러 모아서 유언을 합니다. 몇 명은 축복을, 다른 몇 명은 저주라고 할 수 있는 유언을 했습니다. 물론 야곱의 유언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지만 야곱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받아서 예언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유언을 들으시고 그것을 이루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에게 돌아갈 축복을 다 가로챈 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야곱이 외삼촌에게 속아서 20년 이상을 삯도 없이 일하면서 열 번이나 품삯을 변개 당한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선택이요 그 선택에 따른 결과로 보아야 합니다. 노아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만취해서 하체를 드러내놓고 잠자고 있을 때에 둘째 아들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지 못해서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습니다. 노아의 저주를 하나님의 신탁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은 나이가 먹어서까지 몇 명의 아들들에게 분노와 서운함을 품고 있었습니다. 과거 자신에게 행했던 아들들의 태도와 행동이 여전히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유언한 내용을 보면 분명히 기억을 끄집어내며 축복하든지 저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장남인 르우벤에게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창49:3~4)라고 유언했습니다. 르우벤은 서모 빌하를 범하여서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습니다. 그의 범죄는 성적인 범죄 이상의 것이었으며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야곱 가족이 세겜에 거주할 때에 여동생 디나의 강간 사건 때문에 두 아들은 세겜 족속들에게 거짓으로 할례를 받게 한 후에 전멸을 시켰었습니다. 두 아들은 아무리 아버지가 무능하고 우유부단 하더라고 최소한 상의는 드려야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한 아들들을 기억하면서 야곱은 두 아들을 저주하는 유언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야곱은 아들들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로서 아들들과의 불편함과 미움의 관계를 풀었어야 했습니다. 풀지 못하고 있다가 죽을 때에 아들들에게 분노의 유언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의 잘못에 대해서 분명하게 책망을 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야곱은 나쁜 감정, 분노, 서운함이 다 풀어져서 아들들을 마음껏 축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와 맺힌 것을 풀지 않고 있으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저주는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르우벤은 장자의 명분을 잃었습니다. 르우벤 지파에서는 어떤 지도자도 나오지 못했습니다. 사사시대에 조차도 르우벤 지파 중에서는 사사도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장자였지만 그만큼 지도자의 역할을 하지 못한 지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유다 지파가 차지한 땅을 분할 받아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야곱의 유언처럼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에 귀속되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지파가 되었지만, 레위 지파도 각 지파 속으로 흩어져서 살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유다와 요셉에 대해서는 마음껏 축복을 쏟아냅니다. 유다는 사자와 같이 용맹할 것이며 그에게서 통치하는 왕이 나올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그의 유언처럼 유다는 12지파 중에서 가장 용맹한 지파가 되었으며 왕의 지파가 되었습니다.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 나오고 메시야 예수그리스도가 등장했습니다. 유다와 요셉에게 유언한 축복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한 근거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창49:28) 야곱은 과거와 현재에 보여 지는 상태로만 자녀들을 축복했습니다. 야곱이 경험한 아들들의 태도와 행동을 보고 유언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의 분량을 자신이 한정시켜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제한하고 선을 그어놓은 그 분량대로 축복했습니다.
분량대로 축복하는 것이 쉽고 일반적입니다. 그 분량과 범위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과거를 생각하고 현재를 보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량대로가 아니라, 분량 이상으로 축복하면 어떨까요? 그 사람의 잠재력, 가능성, 은사, 장점, 탁월성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향한 여러분의 축복을 들으시고 귀에 들린 대로 그대로 시행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를 제일 분량 이상으로 축복을 못하십니까? 가까운 사람인 남편, 아내, 자녀, 동료들에게 그렇지 않나요? 남편이 마음에 안 들면 아내들은 이래라 저래라 하지만 남편은 그러면 그럴수록 더 안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순종의 대상이지 책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마음에 안 듭니까? 요리를 해도 맛이 없고, 청소를 해도 마음에 안 듭니까? 자녀들 양육을 잘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그럼 책망하십시오. 그러나 개인적인 의견으로 말고 말씀에 근거해서 책망하십시오. 누구랑 비교해서 특히 시어머니랑 비교해서 책망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싸움납니다. 그러나 오히려 아내를 사랑해주고 남편이 도와줘 보십시오. 그럼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예쁘고 상냥한 아내가 될 것입니다. 자녀들이 미숙하고 어려 보이고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아이들하고 비교하면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선포하고 세워주고 칭찬하면, 즉 분량 이상으로 축복하면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끄집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분량대로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내게 행한 것을 여전히 기억해서 그것대로 말하려고 해서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미래와 장점과 은사를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미워서 그렇습니다. 나 중심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푸십시오. 현재보다는 미래를 보십시오. 그리고 분량이 안 되는 것 같아도 축복하고 격려해보십시오. 내가 알고 있는 분량으로 다른 사람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야곱이 자신의 생각과 한계를 벗지 못한 것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분량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분량 이상으로 복 주신 것처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분량 이상으로 그 사랑을 보여주시며 확증하셨습니다. 배우자, 자녀, 동료, 친구들에게 분량 이상으로 축복해보세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