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셋이 군사를 모아서 이스라엘을 침공한다는 소식에 사울 왕은 두려웠습니다.
선지자 사무엘도 죽었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보았지만 하나님은 대답이 없으십니다.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6절)
사울은 급기야 어리석은 일을 선택하고 맙니다.
신접한 여인, 즉 무당을 찾아갑니다.
왕이 된 초기에 사울은 무당들을 나라에서 다 쫓아내는 기특한 일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악한 자를 찾아가는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됩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무당을 없애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출22:18)
"남자나 여자가 접신하거나 박수무당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레20:27)
사울이 하나님이 대답이 없으시자 두려워서 무당을 찾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두려워서 무당을 찾습니다.
앞 일이 두렵고 걱정되니 무당이라도 찾아가서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앞 일이 깜깜하고 보이지 않으면 두렵습니다.
큰 일을 앞두고, 어떤 일을 시작하면서 두렵기도 합니다.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아무 대답도 없으시면 그 두려움이 더 커집니다.
그래서 점집에? 무당집에?
그러나 하나님이 대답이 없으시면 그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음과 죄악이 있다면 다 버리고 엎드려야 합니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이 있다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울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철저히 회개했어야 합니다.
자신의 악함과 불순종을 깨닫고 무릎을 꿇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울은 그렇게 하지 않고 무당을 찾는 악한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무당을 찾는 이유중에 하나는 포기하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버릴 것과 포기할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가야 하는데,
포기하지 않은 채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욕심을 부립니다.
만약, 하나님의 대답이 없으시면 한 번 체크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런 저런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내 욕심과 어리석음과 죄악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엔돌의 신접한 여인은 사울의 요청을 받고 죽은 사무엘을 불러옵니다.
성경에도 이런 신기한 일이 기록되어 있어서 혼돈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무엘의 영혼이 다시 이생으로 왔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무당이 부른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죽은 큰아버지, 당숙 목소리를 내면서 무당이 용한 말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악한 꾀임과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악한 영은 거짓말과 분열의 말로 사람들을 이간절합니다.
무당이 아무리 용하고, 쪽집게처럼 알아맞힌다고 하지만 다 속임수입니다.
영적인 어떤 능력 있는 사건인 듯 가르치고 있지만 거짓이요 착각입니다.
맞는 것 같고 용한 듯 해보이지만 속임수입니다.
두려움에 사로 잡힌 사람들을 현혹해서 자신의 수하에 묶어두려는 계략입니다.
대답 듣는 것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들어야 할 곳에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듣지 못하면 결국은 두려움에 사로 잡힌 삶을 살다가
사단의 종으로 종노릇하다가 살다 끝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