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셋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삼상29장).
블레셋은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그 대군에는 가드 왕 아기스가 있었고 아기스 뒤에는 다윗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가드로 망명해서 지내고 있었기에 아기스의 신하로서 충성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합류하려고 하자 블레셋의 방백들이 크게 노합니다.
다윗은 분명하게 다시 이스라엘의 왕과 화합여서 우리를 칠 것이라고 다윗을 거절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했었던 이스라엘 여인들의 외침을
블레셋 방백들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다윗은 위험 인물에 속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생각은 사실 틀립니다.
다윗은 아기스를 배반하여서 사울과 합하여 블레셋을 대적하여 싸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으로서는 매우 난감하고 힘겨운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리 사울이 밉다고 해도 동족인 이스라엘과 칼과 창을 들고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기스의 용병으로서 싸움에 나서지는 않고 가만히 쳐다만 볼 수도 없습니다.
다윗이 싸우러 나서지 않았다면 충성스런 신하가 아니라는 의심을 아기스에게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다행히도 블레셋 방백들이 다윗의 곤란함을 해소시켜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래서 다시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 처소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동족과의 싸움을 막아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있습니다.
난감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곤고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 상황과 사람을 만져주시고 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다들 자기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그렇게 성실하고 정직하게 아기스를 섬겼던 다윗도 블레셋 방백들은 생각하기를
블레셋을 배반할 사람으로 경계하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의 곤란함을 알지 못하고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대동하려는 순진함이 있었습니다.
다윗에 대해서 아기스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다윗)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3절)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6절)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9절)
나도 이렇게 다윗과 같이 가까운 사람이 볼 때도 정직과 선함과 의로움이 있기를 소원해봅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몰라도 정말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다들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이익의 잣대로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알고 다른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과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어야 합니다.
물론 나의 입장과 다른 사람의 입장을 적절히 고려하면서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그럼 하나님께서 가장 선하게 인도하시고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인 성경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잘 받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