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야 할 때에 직접 나서지 않고 요압과 그 신복들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에 특히나 전쟁은 왕이 직접 나서야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더군다나 "왕들이 출전할 때가"(삼하11:1) 되었지만 다윗은 출전하지 않았습니다.
전쟁터에 나가지 않은 다윗은 궁전에 남아서 안락함과 호사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그녀를 범하는 죄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나라도 견고해지고, 조공도 들어오고, 왠만큼 편안해지니까 다윗에게 안일함이 생겼나봅니다.
차라리 광야에서 고난 가운데 있을 때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물었던 다윗인데 말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간사하고 교만해지기 쉬운 존재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다윗 조차도 그런 죄악에 휘말리게 되는 것을 보니까 더욱 그렇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몰래 그 사실을 숨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밧세바가 자신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아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전쟁터에 나간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아를 집에 들어가서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게끔 호의를 베풉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을 덮어버리려는 비열하고 간악한 짓을 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아는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11절)라고 결연히 말합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다시 전쟁터에 보내면서 군대장관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아를 깊은 전쟁터 속으로 보내서 맞아 죽게하라고 명령합니다.
결국 충성스러운 우리아는 전쟁터에서 영문도 모르고 안타까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듯 악한 생각을 품게 되면 그 악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한 번 시작한 죄악을 중간에서 멈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됩니다.
악에 사로잡히며 끝까지 가는 특성이 있습니다.
시작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악이라면, 마음에 불편함이 있다면,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시작하지 마십시오.
악은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아야 끝나게 됩니다.
죄악에 사로 잡히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멈추기 어렵습니다.
죄악을 시작하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요셉처럼 그런 환경 자체를 빨리 피할 수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