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함, 그것은 하나님의 마무리 은혜입니다.

by 김세열 posted Oct 1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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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12:7~10

서론: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갖습니까?
능욕이란 모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다른 단어들은 대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학창시절에 국어시험을 보면 어떤 글의 한 문단을 예제로 주고는 이 글의 내용과 다른 것은? 또는 이 글의 분위기와 다른 것은 무엇인가? 등의 시험문제가 있었습니다. 만일 중학교 국어시험에 이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 이 5가지 단어를 나열하고서는 관계없는 감정을 찾으시오? 하고 보기로서
1. 두려움 2. 근심 3. 불안 4. 고통 5.기쁨 이라고 출제되었다고 합시다.
그럼 이 문제를 읽어가는 순간 수험생들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5번, 기쁨이라고 주저없이 답을 쓸 것입니다. 만약  5번 기쁨이라고 쓰지 않은 학생이 있다면 아마 이 두 종류의 사람 외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지금까지 외국에서 살다가 엊그제 한국 중학교에 막 전학 온 거의 외국인 학생, 둘째는 답안지 밀려 쓴 학생입니다.
이처럼 언어를 아는 사람들에게 능욕과 궁핍 불안 고통은 기쁨과 전혀 상관없는 대조되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놀라운 역설을 보게 됩니다. 바로 이 단어들을 기쁨과 연결시키는 당대 최고의 학자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고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그것이 바로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요 수사학자요 신학자요 헬라어와 히브리어 아람어등 다국어에 능통한 석학 바울이 이 고통과 괴로움과 근심스런 단어들을 기쁨과 함께 어울려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왜 그런, 즉 보통의 세상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할까요? 바울은 도대체 어떤 논리로 그런 역설을 말할까요? 만일 그런 역설이 통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져 보일까요? 오늘 여러분에게 있는 고통과 근심의 일들이 바울처럼 기쁨의 대상으로 바꾸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이 이런 고통의 단어들을 기쁨으로 깨닫게 된 것은 그와 관련된 한 사건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표현된 바에 의하면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가시라는 단어는 원래 말뚝이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합니다. 육체에 말뚝같은 것이 박혀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약간의 고통이 아니라 굉장히 심한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신학자마다 견해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마귀가 바울의 마음에 망령된 의식을 주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며 바울의 마음의 부정한 음욕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육체적인 질병으로서 우울증, 편두통이다 간질이나 안질이다 여러 가지로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단의 사자라고 표현된 것처럼 아주 바울에게는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며 나쁜 것인 것만은 틀림없었습니다. 분명히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로 인해 바울은 선교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또 전도받는 자들이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보고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남을 구원하겟다는 거냐 하는 비방거리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고통으로 인해 오랜시간 가르치는 일도 힘들것입니다. 아마 두란노서원에서 오전부터 오후까지 6시간이상 강의를 하려면 파김치처럼 될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 그것은 바울에게 분명 사단의 사자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늘 이 육체의 가시만 내게서 사라진다면 분명 더 나는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텐데 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해달라고 주께 3번이나 간구하였습니다. 그 간구는 애를 끓는 간절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에게 있는 이 육체의 가시를 떠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계속적으로 남겨두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 뻔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자를 살리시는 분이었습니다. 바울자신이 전도여행시에 그 전능한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살리고 빌립보에서는 점하는 귀신을 쫓아내고  심지어 에베소에서는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고 했습니다. 드로아에서는 다락에서 떨어져 죽은자를 살려내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바울의 손수건으로 병을 낫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다니, 바울의 손수건도 능력이 그만하다면 바울사도가 직접 손을 얹고 기도하면 얼마나 큰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죽은 자를 살렸다면 살아있는 자들의 병쯤은 우습게 고쳐야 될 것이 상식입니다. 게다가 남모르는 자들도 고쳐주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인 바울사도 자신의 몸에 난 병에야 두말할 것도 없이 나아야 될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바울사도의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에게서 거절당했습니다. 처음에 바울이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하나님의 뜻이 어디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바로 바울의 역설은 하나님으로 시작된 역설이었습니다. 그 중에 저는 족하다라는 것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여기서 족하다는 것은 누구에게 무엇을 주면서 필요한 것양이 100이라고 할 때에 한 70-80% 정도를 주고는 마 고마 됐다.! 그 정도면 됐다. 뭐 그 정도 받으면 좀 부족해도 만족해거라 해서 실제는 조금 부족하지만 만족하게 여기라는 것처럼 이해하기 쉽습니다.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Sufficient 즉 충분한것입니다. 충분한 것은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충분한 것처럼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충분하여 온전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모든 은혜를 열거하지 않더라도 본문의 7절에 보면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알수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것은 아주 특별한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은혜입니다. 아무나 받을 수 없는 하늘의 비밀입니다. 바울은 그 계시를 받았는데 보통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큰 계시를 받았습니다. 바로 12장 앞부분에 설명한대로 셋째하늘에 이끌려가서 가히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너무 크므로 사람이 하나님에게 받을 수 있는 은혜의 정도를 따wu서 은혜도를 100점으로 잡습니다. 그리고는 그런데 사단의 가시와 같은 연약함이 있으니 -마이너스 5점, 외모가 볼품없다고 했으니 -2점 또 글에는 강하나 말에는 졸하다고 했으니 -1점, 그래91점. 그렇게 최고점에서부터 은혜도를 내려옵니다. 그리고 80~90점에 이르면 그정도면 하나님은 은혜가 족하다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바울이 여러 계시를 받고 건강하고 형통한 때에 80-90점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가시와 육체의 연약함, 그리고 궁핍과 핍박과 능욕과 곤란이 올 때에 은혜도가 올라갑니다. 그리고 사단의 가시가 거절당했을 때에 비로서 은혜도가 100점으로 충분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적인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 할 때 사업의 번창과 시험에 합격과 건강과 장수 등등을 이야기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선물들만으로 우리는 온전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더 충분히 주기 원합니다. 그래서 은혜의 높은 단계에 이르도록 아주 고급은혜로 마무리를 채워주십니다. 그것은 은혜가 온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들은 연약함과 실패와 좌절과 아픔의 은혜입니다. 마무리단계의 고급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아는 순간 이렇게 외치고 싶어합니다. 아니요! 하나님, 그런 은혜는 싫습니다. 나는 그것이 은혜라고 해도 그런 은혜는 원치않아요. 정 그것이 은혜라고 한다면 차라리 날 부족한 대로 그냥 놔두세요.

만약 그러나 마무리 은혜가 없다면 바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울은 자고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받은 계시와 환상과 은혜들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도 압니다. 교만은 놀라운 욕구입니다. 누르고 눌러도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는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죄악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랑하고 뻐기는 마음이 늘 용솟음처서 억제할 수 없을 때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이것을 늘 의지적으로 누르는 것은 너무 큰 고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사단의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 사단의 가시는 바울의 마음속에 한컷 부풀어 오르는 교만의 풍선을 터뜨려버리는 가시로 작용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에 역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이 연약할 때에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 주간에 제게 의미있는 두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연희극회 동문 신우회의 모임이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며 또 하나는 오늘 영동세브란스에서 진료를 받은 일입니다.

연희극회 동문 신우회모임-
연극반은 다른 서클과 달리 굉장히 전통이 있고 계율이 엄해서 제가 느끼기에는 거의 군대같았습니다. 그래서 줄빠다가 있어서 4학년 선배가 3학년을 때리고 3학년이 2학년, 제 윗선배들이 저희를 때리는 것이 통용되었던 그룹이었고 동문합동 공연에는 아주 오랜 선배들이 모여있는 곳이었습니다. 선배의 명령은 틀려도 들어야 되는 그래서 기차바퀴가 박달나무로 만들어졌다고 말하면 그대로 복창하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로 선배들과 함께 좌석에 앉으면 저희들은 주로 선배들은 말하고 저희는 그 말씀이나 듣고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배님 들 중에 몇 분이 졸업후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자녀문제, 사업문제, 여러 가지 고통과 어려움을 겪은 후에 하나님을 알게 되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배중에 목사가 있으니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모임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감회가 새롭더라구요. 모임장소에 가니 9년이나 선배님이 까마득한 후배인 제게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는 첫마디가"목사님 어떻게 이렇게 힘든 걸음을 하셨습니까? "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상석에 앉게하고 공손히 차를 대접하고  예배를 드릴 때는 물론이고 일반 대화를 할 때에도 제가 대화를 끊고 다른 이야기를 꺼내도 다 따라옵니다.
옛날 같으면 "선배가 이야기하는 데 건방지게 껴들어 화제를 돌려!" 했었을 텐데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돌아오면서 참 목사되니 좋구나. 조금은 우쭐하고 여유있는 걸음으로 돌아오면서 나를 이렇게 높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영동세브란스 진료
제가 목소리가 쉬어서 탁성이 된지 한 10년이 되었습니다. 10년전에는 제가 오히려 목소리가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대학극에서 연극배우를 정하는 것이 캐스팅인데 제가 외모는 딸려도 목소리 하나 가지고 주인공을 많이 따냈습니다. 어쨋든 떨어졌지만 성우시험을 볼 정도니까 보통이상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에 교회에서 산기도를 다녔는데 기도훈련을 받는데 목소리를 관리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만 쉰목소리가 되었고 그것이 굳어졌습니다.  2년전즘에 검사를 받았는데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해서 포기하고 지내왔었습니다.
그런데 박현국집사님이 성대수술을 받으면서 친절하게 제 상태를 여쭈어보았는데 아주 희망적인 답변을 들었답니다. 의학기술이 발전되고 했으니 목사님도 가보라고 여러번 자신있게 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하나님이 내년에 개척하게 되니 목소리를 고쳐주시려는 것인가보다하고 생각하고 예약을 하고 몇주간의 텀동안 가끔식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집사님들도 기도해주고 관심을 가져주면서 목사님의 옛목소리가 기대되요라고 말하니, 나도 덩달아 기대가 커졌습니다. 나도 내 목소리를 잊어버렸는데... 그리고는 스스로 수술을 언제 할까 아무래도 방학이 좋겠지. 이런 저런 생각을 했는데 막상 진료를 받으니, 아직까지 수술방법이 없답니다. 혹 의술이 더 발달되면 모를까 더 나빠지지 않도록 목을 조심하고 일단 약물이라도 해봅시다라는 것입니다.

순간, 하나님, 이게 아니쟎아요 라는 생각이 들고 힘이 빠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병원에 뇌종양 수술로 입원해 있는 이영해성도님 심방을 갖습니다. 그분은 악성은 아닌데도 아직 왼쪽눈을 감고 있었고, 목소리도 힘이없어는데 한마디로 별 회복이 없어보였습니다. 나를 알아보고는 힘없는 중에 간신히 하는 한 말씀이 "제가 병나면 그 교회다닐께요" 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마음이 아련했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오랫동안 이분을 아프시게 하는지 알수 없습니다.  저는 아마 제 마음의 낙심한 것하고 이영해성도님 차도 없는 것하고 한꺼번에 하나님께 서운해하고는 돌아오는데 서운함때문인지 오는 지하철 내내 고개를 휘저으며 졸면서 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안에 있지만 그래서 구원의 은혜와 신령한 복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가장 크고 놀라운 복중의 복이요 최고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우리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시 자주 아프기도 합니다. 우리도 자주 중요한 시험에 떨어지고, 사업도 어려워서 궁핍하기를 오래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이 일찍 죽기도 합니다. 많은 부분 우리의 적은 이해로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니라.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포기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전의 극동방송에서 어떤 학생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는 미국에 있는 성악전공의 입시생이었습니다. 그가 대학시험인지 대학원시험인지는 확실히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는 시험을 위해 오랫동안 음악연습을 했습니다. 그런데 불안하고 초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누나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불안하고 두려워할 때에 하나님이 네 옆에 계시단다. 그 때에 기도하렴
시험전날이었는데 음악연습을 마치고 모든 준비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답니다. 그런데 밤이 깊어가는데 오히려 긴장과 불안때문인지 더 잠이 오지 않더랍니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오지 않는데, 그 누나가 해준 말이 기억났는데 "잠이 오지 않을 때는 바로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듣고 싶어할 때야"라는 말이었답니다. 그래서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일 시험입니다. 잠이 오질 않습니다. 잘 쉬고 좋은 시험볼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짧게 기도하고 잠을 청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주님이 나의 기도를 얼마나 듣고 싶어하셨길래 시험 전날 나를 이렇게 부르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울음이 북받치고 지난번의 모든 일을 회개하며 기도하고 손을 들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보니 새벽 6시였고 누나는 아침밥을 준비하고 있더랍니다. 시험날에 목을 잘 쉬게 해주어 기름지게 해야 하는 것인데 밤을 새었으니 너무 걱정이 되었습니다.
시험장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노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는 확신이 들면서 마음이 뜨거워지고 은혜가 넘쳐서 오디션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가 이전에 불렀던 어떤 노래보다도 아름다운 노래가 나오고 있더랍니다. 전에는 은혜를 끼치기 위하여 표정과 감정등을 최대한 애써서 노래하였지만 그 때는 이미 은혜가 충만하여 나도 모르게 노래에 취해서 부르는데 오디션에서 시험중에 시험관들이 부라보 부라보를 말하기도 하고 발표전에 이미 전액 장학금을 줄터이니 다른 대학에서는 시험보지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그렇게 다른 대학에서 두 번 시험보았는데 그 모든 대학에도 동일하게 전액장학생으로 모집하겠다고 하는 소식을 받아서 오히려 어디를 갈까를 행복한 고민을 하게되었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실패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강함을 체험하는 기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도 쉽게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해지고 실패하면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뢰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뢰할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더 큰 능력을 베푸시고 은혜를 베풉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온전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약함은 은혜의 마이너스가 아니라 은혜의 플러스입니다. 부족한 은혜를 채우는 마무리 은헤가 됩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온전하여 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 약함은 하나님은 더 큰 은혜와 능력을 받는 그릇이 됩니다.
여러분 약한 것이 있습니까? 궁핍이 있습니까? 곤란이 있습니까? 능욕과 박해가 있습니까?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여러분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곧 나를 능력으로 인도해주실 것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가진 기쁨을 함께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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