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회복과 인내

by 조범민 posted Oct 2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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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청년2부 집회에서 했던 설교 전문입니다. A4 7매 분량 전체를 올립니다. 설교자로 세워가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스승이시며 선배이신 교역자들께 감사와 존경을 드립니다. 설교자로 서 나가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복과 인내”

디모데전서 1장 12-17절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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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날 사회를 어지럽히던 살인자 김현양이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이 세상 서로를 존중하며 아껴주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면 ‘저같은 죄인은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잊지 말고 전해주세요. 이재명님이 나눠주신 사랑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조금 남은 생이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야겠지요. 이재명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김현양 올림.”
  이 글은 199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 중 한 사람이 그들을 돌보아준 이재명 집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처음 체포되었을 때 고개를 빳빳이 들고 죄를 뉘우치지 않던 그 모습은 어디 가고 이렇게 순한 양처럼 바뀌었을까?
  모두 싸늘한 눈초리를 보내고 가족조차 외면할 때 오직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만이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으로 접근했다. 결국 그들의 닫힌 마음이 열렸다.
-영신교회 이영무 목사, 국민일보 10월 11일 금요일

  오늘 함께 읽은 이 본문은 바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던 일을 회상하며, 또 그에게 하나님이 복음 전파의 일을 맡기신 과정에 대해 바울이 감격하고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 두 가지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구원을 감격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깊이 만났던 시간에 받았던 말로 다할 수 없는 감격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감격은 침체된 바울을 일으키는 회복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바울을 오래 참음으로 세우신 것을 기억하며, 우리 가운데 사랑의 오래 참음을 통해 다른 사람을 세우는 일이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된 것을 회상할 때마다 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의 그러한 마음은 오늘 본문 안에서는 “감사(12), 긍휼(13), 은혜(14), 믿음(14), 사랑(14), 긍휼(16)”이라는 말들로 표현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 행적을 잘 기억하기 때문에 예수를 만난 사건으로 인한 자신의 변화, 그로 인해 헌신하게 된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사역에 대해 그토록 감격해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바로 어제 일을 기억하며 기뻐하듯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예수를 믿기 전에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심히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기독교의 첫 순교자인 스데반의 순교 장면에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맡아주었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또한 다메섹이라고 하는 곳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사장으로부터 그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해 올 수 있는 증서를 얻어, 그들을 잡으러 떠났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야 말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적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행했던 자신의 과거를 가리켜 13절에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훼방자’는 그리스도를 악하게 말한 것입니다. 이 표현 안에는 스스로 악하게 말한 것뿐만 아니라, 예수를 주님이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악하게 말하도록 강요했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또한 ‘핍박자’이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와 그들의 교회를 심히 박해한 것을 뜻합니다. 포행자라는 것은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해 모욕과 핍박을 가하는 것에서 마음의 만족을 삼았던 바울의 마음 상태를 표현합니다. 13절의 뒷부분의 내용이 알려주듯, 비록 그가 모르고 행했지만, 너무도 불쌍하고 안타까운 행동과 마음을 두루 가졌던 바울이었습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폭력을 가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회심 이전의 바울은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에 대해 정말 자타가 공인하는 훼방자, 핍박자, 포행자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을 하나님은 이방인 가운데 복음 전하는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바울의 악을 정죄하여 그에게 천벌을 내리시지 않고서 말입니다. 또, 바울이 이제 마음을 고쳐먹겠다고 다짐한 이후가 아니고 악한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인 사냥을 가던 길이었는데 말입니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은 정말이지 너무도 극적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내기 위해 작정하여 떠났던 그길 가운데,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그의 눈을 멀게 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누구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하심으로 많이 알면서도 무지했던 핍박자인 바울로 하여금 참된 복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또 시간 간격을 두시고는 그의 눈을 고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하는 사도로 세우신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하나님이 복음 전하는 사람으로 세워야 마땅할 사람은 교회에서 잘 자라난 사람, 또 복음을 잘 배운 사람이어야 할 것 같은데, 유대교도로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작정하고 핍박하였던 바울을 기독교 최대의 복음 증거자로 세워주셨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한 로마서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그때에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시며 강권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나의 이점을 예쁘게, 좋게, 잘 봐 주셔서 날 불러주셨어”라는 착각을 갖고 계시지는 않은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외모로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어떤 좋은 점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구원하시도록 그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울과 같이 훼방자요, 핍박자이며, 포행자이었을 그 때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회복되는 과정에서 바울은 육신의 눈만 고쳐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에 바울은 훼방자와 핍박자, 포행자였던 사람에서 예수님의 열렬한 지지자요 전파자로 변화되는 영적인 회복을 겪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이 구원을 얻은 감격스러운 순간이 있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은 수십 년 전 회심 장면을 떠올리면서도 어제 일어났던 일을 기억해내듯 감사와 감격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바울과 같이 주님이 나를 불러주신 사실 때문에 감격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바울의 회심과 같은 극적인 상황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구원 역시 바울과 똑같이 복된 구원이며 온전한 영적인 회복이 동반된 구원이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구원의 감격을 쉽게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주님으로 인해 체험했던 잊을 수 없는 감격의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기쁨이 물밀 듯 올라왔던 시간들을 기억하십니까? 눈물로 기도하며 주님께 마음을 드렸던 시간을 기억하십니까? 삶의 순간순간 인도해주셨던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던 순간이 떠오르십니까? 고 3시절 아침마다 ‘새벽나라’라고 하는 큐티 교재를 가지고서 말씀 묵상을 했었습니다. 아침 시간 피곤하잖아요. 또 마음의 여유도 없는 때였고요. 거의 매일 아침 밥 먹고 잠깐 책상에 앉아서 10분정도 그날 분량을 읽고서는 잠시 기도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습관과도 같이 했던 그 시간, ‘너무 힘들어요. 주님 저 좀 위로해주세요.’ 했을 때 눈물 주루룩 흘렀던 시간을 기억합니다. 늘 반복되는 학교 생활이었는데도 그런 날엔 좀 성실히 또 의미있게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여러분 안에도 저처럼 위로하셨던 주님, 회복하게 하셨던 주님,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하셨던 주님에 대한 따뜻한 추억이 있지요?
  찬송가 489장은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고 말해줍니다. 1절에서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또 2절에서 “세상 근심 걱정 너를 누르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갈 때 주가 네게 주신 복을 세어라 두렴 없이 항상 찬송하리라”고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어요. 당시엔 힘겨운 굽이굽이 길이었는데 지나고 생각하면 순간순간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감사와 감격했던 순간이었음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런 기억들은 현재 마음이 깊이 가라앉아 있을 때에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 안에 감격과 감사가 충만해집니다. 혹시 우리 중에 지금 하나님을 향해 만족하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며, 감사하지 못하고, 주님을 감격하지 못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지금이 우리 안에 바울과 같은 회상을 해야 할 시기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신 순간의 감격, 하나님께 받았던 은혜의 순간들이 다시금 기쁨과 감격으로, 더 나아가 참된 감사함으로 우리를 이끌고 회복하도록 할 것입니다.
  D. T. S. 가기 전이었습니다. DTS는 제게 참으로 많은 시간 준비하고 벼루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 일을 위해 6개월이나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1년간 학교 공부를 중단했고요. 제가 학생 시절 사용할 수 있는 딱 1년의 휴학 기간을 투자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되어지고 곧 있으면 DTS를 받으러 떠날 시간이 되었는데요. 병무청에서 “해외여행 허가를 해주지 않아서” 낙심한 순간이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DTS를 준비하는 제 마음을 점검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저는 DTS를 갈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기도 중에 주님은 강하게 제게 DTS 자체를 주님 손에 온전히 맡기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DTS를 어디로 갈지 언제 갈지 등 DTS에 대해 결정하였던 나의 권리를 주님께 내어드리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눈물 흘리는 그 시간을 통해 주님은 제 마음을 만져 주셨고 평안한 마음으로 되든 안 되든 이젠 주님 뜻대로 하리라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제 안엔 이전에 없던 참으로 평안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며칠 지나서 병무청의 허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이런 일들이 많이 있죠? 이번 주간 중간고사 기간이었습니다. 학사에서 아침에 혼자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찬송가 483장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를 불렀습니다. 조용히 기타를 치면서. 찬양을 부르던 중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하는 가사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은밀히 보시는 주님이라면 내 마음 속 깊은 생각을 가장 잘 알고 계신 분이시겠지. 내 마음 속의 악한 생각들과 더러운 마음 상태를 아실 하나님이신데,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벌을 내리시리,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널 정죄하시리가 아니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주님 앞에서 감격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올려드리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앉는 순간 주님과 대화하기 시작하는 그 시간은 우리 안에 전에 없던 기쁨이 회복되는 순간이고 우리의 감격이 되살아나는 순간입니다. 모양과 시간과 장소는 다르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분명히 믿는 사람 누구에게나 동일한 은혜를 베푸실 줄 믿습니다. 주님 앞에서 감격했던 순간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 그 감격을 달라고 기도하며 주님 앞에 나올 때, 주님은 우리에게 마음 깊이 솟아나는 참된 기쁨과 회복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바울에게 있어서 마음 아프고 그를 낙심하게 했던 것은, 1장의 앞부분의 내용에서 살펴볼 수 있겠지만, 거짓 복음을 전하는 거짓선생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알고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참되고 명쾌한 복음의 길로 이끌어야 할 교회의 선생들이 오히려 혼란과 변론을 일삼도록 했던 상황은 바울의 마음을 너무도 아프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씹고 씹어 쓴 물을 음미하며 인생은 고단하다고, 복음 전하는 일은 너무도 힘겨운 일이라면서 자조할 수 있을 상황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선택한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경험했던 잊을 수 없는 참된 행복의 순간을 회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아픈 상황을 넘어서 바울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 되살아나며, 다시금 하나님께 감사와 감격을 올려드릴 수 있는 마음 상태로 변화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은 다 다를 수 있지만, 우리도 바울과 같이 기쁨과 희열로 바뀌는 순간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이며, 주님 앞에 나오는 순간이 바로 회복의 시점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수련회나 선교지에서, 함께 둘러앉아 혹은 서서 서로를 격려하고 칭찬했던 시간, 함께 손을 맞잡고 기도했던 그 때에 기쁨과 감사, 또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회복되었던 일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자, 바울이 침체된 마음 상태의 회복을 가져다줄 자신의 회심의 순간을 묵상하였듯이, 우리를 침체되도록 상황이 몰리고, 무엇에든 우리의 마음이 눌려있다면, 바로 그때가 저와 여러분이 받은 복을 세어보며 우리 안에 다시 은혜를 부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순간들인 것입니다. 우리 그 때를 위해서라도 자주 주님 앞에 섭시다. 우리 그 때를 위해서라도 예배 때마다 찾아오시는 주님 앞에 우리를 내어드려 기쁨으로 충만해집시다.

  계속해서, 바울의 회상은 16, 17절에서 참으로 감격적인데요, 하나님은 본래 자기와 같은 죄인을 부르시기 위해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행동은 자연히 “오래 참으셨던” 것입니다. 저는 두 번째로, 이 오래 참음에 대해 함께 생각하며 나가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죄인 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타이밍을 맞춰 가신 것입니다. 인간의 편에서 볼 때 이 타이밍이라는 것은 많은 경우 “지루한 기다림, 의지를 죽이고서 인내하는 기다림, 내가 나서고 싶은 순간들의 연속”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바울 한 사람을 사도로 만들어 내기 위해 길고 지루하면서도 마음이 아려오는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부르시기 위해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는 그 때에도 참으셨습니다. 너무도 사랑하는 스데반의 그 처참한 돌로 맞음의 순간에도 우리 주님께선 바울을 참으시는 시간을 갖고 계셨습니다. 바울과 그 곳의 유대인들을 벌하시기 위해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내리시는 대신에 말입니다.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로 인해 박해당하고 죽임 당하였던 것을 참으셨습니다. 직접 찾아오셔서 멱살을 잡고 그만하라고 고함을 지르는 대신에 말입니다. 정말이지 참고 싶지 않을 순간이었을 것 같은데 주님은 참아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바로 그 오래 참으심이 바울을 구원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바울의 악한 행동의 순간 화를 내시며 진노하시고 벌하셨더라면, 바울은 기독교의 배척자로 길이 이름이 남았을 텐데, 그 한 사람을 길이 참으셔서 바울을 얻으셨고 그를 기독교의 참된 전파자로 세우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울의 입을 통해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신 주님”에 대한 참으로 넘쳐 나오는 감격과 기쁨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핍박자 바울과의 싸움에서, 참된 승리는 참고 견디어낸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저는 두 번째 적용인 “기다림”에 비중을 싣고 싶었습니다. 우리 안에 서로 오래 참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과도 같이 우리의 참음의 순간은 우리가 참지 않고 싶을 바로 그 사람을 온전히 세우는 “중요하고도 진지하며 참으로 큰 뜻이 있는” 참음이요, 기다림이 됩니다. 참지 않고 그에게 알맞은 대우를 즉시 해버릴 때 우리는 그가 당장은 고갤 숙이고 아파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런 가운데엔 우리가 바라는 참된 변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그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참고 기다려주면 한 사람을 얻을 뿐 아니라, 그가 해낼 수 있는 참으로 의미 있는 사역에로 그를  세워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필립 얀시가 쓴 책 중에 [하나님이 나를 외면할 때]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한 장의 제목은 “교회에 위선이 난무할 때”입니다. 그야말로 누구라도 참고 싶지 않는 사람인, 바로 위선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입니다. “나는 그를 토마스씨라고 부르겠다. 그는 좀처럼 교회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항상 다른 누구보다도 더 오래 기도했고 어떤 문제에도 ‘영적인’ 차원에 대해서 가장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그의 친척들을 속여서 가문사업체를 빼앗았고, 수상쩍게 기웃거리며, 거짓말쟁이고, 게다가 너무 엉뚱했다. 비록 나는 몇 년 동안 그를 보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와 즐거이 악수하는 것이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그에게서는 끈끈한 점액이 스며 나왔다.” 이런 위선자에 대해서라도 필립 얀시는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행동을 풀어나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특유의 전개 방식으로 모든 독자들의 공감을 일으킨 다음에 필립 얀시는, 그런 위선자들을 향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할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48쪽에, “누가 다른 사람의 진실을 정말로 알겠는가? 사람이 홀로 있을 때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사람의 행위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의 진심을 평가할 수 있는가?” 또, 50쪽에 “나는 또한 토마스 씨(위선자의 이름)가 내면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마 어떤 위기의식이 지금 그를 변화의 지점으로 몰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하나님의 촉구하심에 응하기 전날에 그를 간섭하고 정죄했던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위선자라 하더라도 우리가 그 사람의 내면을 정확히 알 수 없고, 하나님이 그를 지금 어떻게 다루고 계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섣불리 그에 알맞은 대우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위선에 대해 참으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못마땅함 때문에 그와 마주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참으라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에, 또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어찌됐든 그 역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지금이 하나님께서 그를 정교하게 다듬어 가시는 중인지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의 이 부분은 너무도 치명적인 결함이기 때문에 내가 고쳐주어야 할까요? 주님은 길이 참으셨습니다. 주님이니까 참으셨다고요? 주님은 참으셔서 바울을 복음 사역자로 세우셨습니다. 저걸 고쳐야 사회생활 하지~, 어딜 가더라도 쟨 화내는 그 성격 때문에 적응하기 힘들 텐데~. 쟨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사람 괜찮다는 소리 들을 수 있겠는데~. 그 때에라도 좀 더 기다리세요. 주님이 만지고 계시는 중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지난 DTS 전도여행 때 이야기를 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그 때 우리 팀원은 다섯 명이 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두 달간이나 함께 한 집에서 살았고, 이집트 전역을 함께 돌았습니다.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민야, 룩소, 아스완, 시와 사막 등 배낭 여행으로 돌아보아도 좋을 곳들을 함께 다녔습니다. 이제 일주일 간 이스라엘을 잠시 돌아보고 DTS를 시작했던 호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열심이었고, 또 선교단체에 헌신할 정도로 성숙하였다고 자타가 인정하던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고 아끼지 못했습니다. 우리 안에 흐르는 분위기가 그랬고, 서로 너무 힘이 들 때는 그것이 말로 나타나기까지 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해서 팀원들 안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감보다는 실망감이 팽배해져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제 마음 속 한쪽에서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아니라, 화성에서 온 범민이, 금성에서 온 찬우 형제님, 수성에서 온 진욱 형제, 목성에서 온 간사님, 혹성에서 탈출한 명숙 자매님~이란 말이 맞겠다 싶었습니다. 어찌나 개성이 강한지 말입니다. 우리는 전날 텔아비브에서 갈릴리까지 차로 대여섯 시간을 달려 왔더랬습니다. 우리는 갈릴리에서 믹달이라는 곳에 머물렀는데, 그곳 선교사님들의 배려로 너무 좋은 3층 집에 묵게 되었습니다. 그야 말로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그곳 믹달(막달라)에서 가버나움이라고 하는 곳엘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팀의 리더십이었던 제가 차 시간을 체크해야했는데, 하기는 했는데 정확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정류장에 나가 서있는데, 시간이 되어도 차가 오질 않았고 그곳에서 가버나움은  눈앞에 잡힐 듯이 가까이 보이는 곳이어서 우리는 걷기로 했습니다. 중동지방의 따가운 햇볕은 이제 11시쯤 된 시간인데도 우리의 살을 익히는 듯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을 족히 걸었던 것 같은데도 가버나움은 아까의 위치에서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간사님께서 “아니~, 리더십은 뭐하는 리더십이에요? 차 시간을 제대로 확인하셨어야죠?” 하시며 좀 화를 내십니다. 리더십으로 있던 저와 찬우 형제님은 당황했고, “아니, 왜 그걸 지금 이야기하십니까? 지금 간사님만 힘드냐구요~. 우린 간사님이 확인하신 줄 알았죠.”했습니다. 결국 거기서 택시를 타고 다시 믹달로 돌아왔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숙소로 걸어가는 길 내내 제 안에서는 ‘이건 한 번 이야길 해봐야겠다, 간사님이 뭐 이래? 내가 잘못한 건가? 같이 걸어가기로 결정해놓고서는 왜 화를 내시는거야~’ 하는 마음이 막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뙤약볕에 익어서 초췌해진 얼굴로 그곳 선교사님이 차려주신 밥을 먹었습니다. 식사 후엔 너무 지쳤기 때문에 한 시간 정도 쉬고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방에 들어가 쉬면서 ‘간사님이 너무 했다.’라는 생각을 묵상해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적절한 시간을 내어서 간사님이 화내신 건 잘못이라고 따져볼 참이었습니다. 저도 화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좀 있다가 드릴 예배의 인도자가 저라는 것이었습니다. 분한 마음으로 예배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함께 부를 찬양 곡을 뽑았습니다. 뽑는 동안에도 주님은 “너 그 마음으로 예배를 인도할 수 있겠니?” 하십니다. “제가 잘못한 게 아니라 간사님이 화를 내신 건데도요?”하고 말씀을 드리면서도 제 마음에서는 이렇게는 예배를 인도하기 어렵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저로서는 한 번 따지고 싶었지만, 그 예배를 제가 인도해야 하니까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배시간이 되었습니다. 함께 모여 몇 곡 찬양을 하는 중에 우리는 “사랑의 주님 닮기 원하네.”라는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의 주님 닮기 원하네. 그 아름다운 주님 예수 이 세상에서 저 천국까지 닮기 원하네. 주님 예수” 이 찬양을 부르고, 정말 주님을 닮고 싶다고 고백하고, 우리 안에 주님을 통해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용납하자고 이야기를 나누고 기도했습니다. 제안에 북받쳐 오르는 뜨거운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은 저뿐만이 아니라 모두 함께 울었습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을 깊이 만지셨습니다. 그 예배를 통해 주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셨고, 또 선교사님을 통해 서로를 축복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이 참게 하셔서 회복을 경험했던 기억입니다.

  내가 못마땅해 하는 그를 향한 인내는 바로 이와 같아야 합니다. 내가 그 사람의 부모와 선생과 하나님이 아니라면, 직접 나서서 고쳐주는 것이 아니고, 무관심의 인내가 아니며, 다만 주님 앞에서 그에 대한 마음을 아뢰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회복되고서야 그를 다시 보는 것입니다. 제겐 그 때 그 예배의 회복이 참 희열의 시간으로 기억됩니다. 모양과 상황은 다 다르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해야 할 오래 참음의 시간,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인내의 시간을 주님 앞에서 감당해 내기 원하십니다. 많은 부분 그것은 주님 앞에서의 예배와 묵상을 통해 이뤄집니다. 주님 앞에서 갖는 이러한 인내의 시간은 우선 나를 성숙시킵니다. 그리고 그 인내의 시간을 통해 아뢰었던 우리의 기도와 사랑의 인내는 내가 변화되기 원하는 그 사람 또한 회복시키시고 성숙시키십니다. 주님 앞에서 이 인내의 성품을 배우고 실천해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이 시간 정말로 진실로 간절하게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