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에 진노하시는 하나님

by 김세열 posted Oct 2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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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전도하다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내용의 복음을 전하면
자기는 죽어도 지옥갈 이유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는 이제껏 살면서 남에게 해되는 일을 한 적도 없기 때문이며,
남들로부터도 자신은 착한 사람이요 법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란 소리를 들어왔
기 때문에, 자기 같은 사람은 지옥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은 자칭 또는
타칭 의인입니다.
이런 분은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혹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착하게 살던 사람을 단지 예수 안믿는다고 지옥에 데려간다고
엄포를 하는 것은 좀 너무한 것 아닌가? 아니 천사와 같은 순진한 어린애들도 예수
안 믿는다고 지옥가야 한다는 것과, 또 우리 나라를 지켜낸 영웅 이순신 장군이나
선왕 세종대왕 같은 훌륭한 분들도 예수 안 믿었다고 지옥 간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한 것이 아니라 무자비하고 독선적인 것 아닌가? 그러나 그
역시 대답은 간단합니다. 어린 아이들도 얼마나 죄인이며 세종대왕과 이순신 아니
역사의 그 어떤 영웅호걸 또는 성자, 성군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관점으로는 착한
것이지만 인간 본성에 담긴 죄악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온 의문입니다.

이런 분은 사람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잘못은 죄의 기준을 한없이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두기보다는 한없이
더러운 죄인인 인간에게 맞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기준에서 의롭게 여겨지는
어린 아이나 영웅이나 성군들이 의로와 보이는 이유는 그 기준인  죄인된 여러분보
다 그들이 더 착하고 훌륭하게 보이기 때문이 아닌가요? 즉 의의 기준이 한없이 낮
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직 깡패 세계에서 남에게 욕하고 시비걸다가 실컷 패주고 돈 뺏은 것은 별로 나
쁜 짓이 아닙니다. 사람을 성폭행한 것은 조금 나쁜 짓입니다. 그러나 다른 조직과
싸우다 도끼로 사람을 죽인 것은 그 보다 나쁜 짓입니다.
조직 강패에게 사람 패는 것은 별로 나쁜 짓이 아닙니다. 할 바를 한 짓이며 평범
한 일입니다. 별 잘못없는 시민들에게 시비 걸어 패줄 일을, 욕만 하고 참아준 것은 
아주 착한 일을 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늘 악한 죄를 짓는 깡패의 기준에서
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깡패들이 때리고 금품을 갈취하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보통 깡패입니다. 그런데 만
일  때리기만 하고 돈 안 뺏는 깡패나, 돈만 뺏고 때리지 않는 깡패들은 착한 깡패
들에 듭니다.  보통 둘 다 해야 보통 깡패인데 둘중 하나만 하니까 착한 부류입니
다. 깡패의 관점에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한 사람, 악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도 사람들의 도덕성 관점에서 말하
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엔 너무나 악하고 더러운 죄인들인데 인간들의 자기들
기준으로 보면 조금 더 착한 사람이 있고 더 악해 보이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께는 다 악한 죄인들입니다.

지저분하지만 명쾌해보이는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똥을 한 무더기 놓고 보면 그래도 노랗고 깨끗하게 보이는 부분이 있고 더 검고 더
러워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똥무더기에서 노랗고 깨끗한 부분은 그래도 깨끗하
니 버리지 말고 챙겨서 두라고 하면 그럴 사람있습니까? 없습니다. 똥중에서 아무
리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하겠습니까? 대장균과 이질균과 각종 세균들이 한 100억마
리가 있는 것이 보통 대변인데 어떤 것은  1억마리밖에 없으니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저는 인간들중에 보통 사람보다 한 100배 착한 사람은 1억마리 세균밖에 없는 똥이
요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죄인된 사람의 기준으로 어떤 사람은 착하니 지옥에 가
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용납하고 받아들여서 천국에서 함께 살게해 달라고 말하는
것은 더러운 똥중에 깨끗한 부분 골라내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말도 안돼는
것입니다. 

제 잘란 맛에 사는데 자기를 착하게 생각하는 것이 뭐 잘못이겠습니까마는
구원 문제에 있어서는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엄청난 잘못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의미로운 말씀을 이렇게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
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 표현을 쉽게 비유해봅시다. 자신이 간암에 걸려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
다. 그런데 이 간이라는 것은 감각이 둔해서 말기가 되기 전까지는 좀 피로를 느낀
다하는 것외에는 큰 통증이나 감각이 없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병원에 가서 치료
와 수술을 받는 때가 언제겠습니까? 자신이 실제로 병에 걸렸을 때에 찾아갑니까?
아니면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을 깨달았을 때 찾아갑니까?  실제 죽을 병에 걸렸으면
서도 자신은 건강하다고 우기면 그냥 병으로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병자라
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병원에 가서 살 길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어떤 사람은 의인이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라 어
떤 사람은 죄인이면서도 자기를 의롭게 생각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인간들의 죄 문제를 아주 진지하고 강하게 제기하고 있
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인 것을 처절하게 알지 못하면 구원이 필요한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지 못하면
병원에 가는 것을 귀챦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을 살리려면 병의
심각성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제일 먼저 해야할 일입니다. 어떤 더러운 사람을 씻
게 하려면 그 사람이 얼마나 더러운가를 알려주는 것이 우선적입니다. 자신이 아무
리 착하게 살았어도 1억마리 병균이 든 똥처럼 더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
야 소독하고 씻으러 나오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면 그 자신이 철저히 더러운 죄인임을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하려고 합니다. 후에는 남
을 비판하는 거룩하다하는 자들의 죄를 지적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죄
를 지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임을 알려주려고 합니다. 오늘
은 이방인들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려주려고 합니다.

이제 한번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정말 모든 인간들이 하나도 예외없이 즉 선하게 보였던 어
떤 인간들이라도 다 죄인인 것을 인정하십니까? 여러분은 예라고 해야합니다.
아니오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그 죄 때문에 죽
고 무시무시한 지옥불에서 영원히 고통당할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다 아셔야
합니다. 혹이라도 이같은 실제를 잘 모르는 성도님이 있다면 그 분은 구원받은 것
에 대한 기쁨도 없고 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 자
기가 죽을 병에 걸린 줄도 모르던 환자가 병이 나았다는 소식을 들어도 기뻐할 이
유가 없습니다. 먼저 자신의 병이 죽을 병이었음을 알아야 완치의 소식이 감격스럽
듯이 오늘 이 시간에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분명히 깨닫고 죄와 진노에서 
건짐 받은 구원이 얼마나 복중의 복이며 감격적 사건인가를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
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즉 복음안에 하나님의 의, 죄인들을 의롭다하시는 하나
님의 방법이 복음안에 있어서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죄인들을 의롭다하는 것이 필요합니까? 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이에 대
한 대답이 18절입니다.
죄인에게는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3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진노란 무엇이냐? what의 문제와 둘째, 진노는 무엇에게 누구
에게 나타나느냐인 whom의 문제와 셋째, 하나님의 진노는 어떠한 방법으로 나
타나느냐인 How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란 무엇이냐?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해 조금도 용납하시지 못하는 그의 거룩한 품성 때문에 나
타나는 죄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바국 선지자는 이런 하나님에 대하여 1장 13절에 "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보지 못하시
거늘 "하나님의 진노는 악을 참지 못하는 품성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은 철
저히 악을 찾아냅니다. 마치 우리 몸속에 어떤 이상이 있는지 컴퓨터촬영을 하는
것처럼 구석구석 찾아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
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마치 엑스레이저로 숨긴 권총을 찾아내듯
이 감찰하는데 인간의 죄악 역시 감찰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악에 대하여
반응을 나타내게 되는데 그 반응이 바로 진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인간의 진노는 죄를 지
은 사람에게 평소 갖고 있던 개인적인 원한과 분이 포함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감정
이 섞여 죄 이상으로 진노를 발하거나 또는 죄보다 낮게 벌하거나 합니다. 소위 괘
씸죄라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악에 대한 거룩한 적의, 악을 눈감아
주거나 타협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 그리고 악에 대한 의로운 심판을 말합니다.

그럼 둘째로 이 하나님의 진노는 무엇, 또는 누구에게 나타나느냐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18절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온갖 경
건치 못함과 불의함을 겨냥하여 하늘로부터 쫓아 나타난다고 선언합니다.
즉 진노가 나타나는 죄를 두 가지로 구분하면 경건치 못함의 죄와 불의의 죄입니
다. 경건치 못함의 죄는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인 죄이고 불의는 사람에 대한 도덕
적인 죄입니다.
그런데 이 둘의 상관관계는 경건치 못함의 죄에서 불의의 죄가 나오는 것입니다.
경건치 못함의 죄는 어미요 자식이 불의의 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경건치 못함의 죄는 무엇이며 불의의 죄는 무엇인가를 알아
야 합니다. 
경건치 못한 죄란 모른 체한 죄요 바꾼 죄라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되 모른 체한 죄요, 하나님을 경배해야하는데 경배대상을 바꾸어 경배
한 죄입니다.
그것은 성경 21절에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한 자들을 정죄합니다.  또 25절에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것을 정죄합니다. 
주는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라서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데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의 우상에게 영광을 드린  바꾼 죄입니다. 

여러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과 공자의 죄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가 인간으로
평생 살면서 품었던 모든 악한 생각과 불의한 행동을 제쳐놓고도, 하나님을 모른체
한 죄요 경배대상을 바꾼 죄인 것입니다. 이 죄가 하나님에게는 가장 참을 수 없는
죄 중에 죄인 것입니다. 이 죄로 인해 모든 불의와 악이 나옵니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입니다.

여러분, 예수 안 믿었지만 착해 보이는 사람들이 왜 지옥가냐구요? 가장 확실한 죄
목은 모른체 한 죄와 바꾼 죄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이렇게 반대 질문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질문"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은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죄를 지었는데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알지 못하고 죄를 지었다면 억울하지
않을까요?"

19-20절에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천만에다. 그들은 결코 그들의 죄를 핑계대거
나 합리화하지 못한다. 나를 몰랐다고. 흥 핑게대지마라 나는 이미 나의 존재를
능력과 신성을 내가 만든 온 세상 만물에 분명히 보이게 하여서 알게 해놓았다.
그리고 나를 알만한 것이 사람들 마음속에 보였노라.
여러분! 역사 이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을 보여주었고 알게 해 주었습니
다. 두 가지 방법인데 하나는 양심이고 하나는 자연입니다.

인류학자들은 전 세계에 사는 모든 인간에게는 도덕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양심은 어느 정도 문화의 제한을 받지만 여전히 그것은 어느
곳에 누구에게나 옳고 그른 것 간에는 차이가 있지만 악은 처벌받아야 마땅하다고
양심이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또한 자연에는 하나님의 지문이 있습니다. 마치 예술작품마다 예술가의 싸
인이 있습니다.

어린이 미술대회를 본 적이 있습니까? 초등학교 1학년 미술대회의 입상작을 보면
더 잘그린 그림들도 많은 것 같은데 그런 그림들이 탈락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
까? 심사위원들은 누구나 그림을 보면 이 그림이 초등학생이 자신의 실력으로 그렸
는지 아니면 학생의 엄마가 그려주었는지 얼마나 색칠해주었는지 척 보면 아는 것
입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그림이 부모가 색칠해주었음. 밑그림을 그려주었음이라
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술가는 색칠하고 조각한 것으로 자기 자신을 나타냅니다. 자신의 능력과 개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을 때 사람이 도저히 상상조차 못할 놀
라운 능력으로 완벽하게 창조하시고 그 능력과 신성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적 능력은 어찌 다 말로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수많은 미술가들
이 합한다고 해도 석양의 물든 하늘에 펼쳐진 구름의 장관을 연출할 수 있겠습니
까? 온 밤 하늘에 은빛가루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이는 별들을 만들 수 있습니까?
아니 어느 과학자가 살아 숨쉬는 푸른 나뭇 잎사귀 하나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어느 생물학자와 의사가 인체의 신비를 온전히 알았습니까? 아니 모든 생물체 하나
하나는 그야말로 신비, 신의 비밀입니다.

저는 동물의 세계를 보면 감탄을 금치못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평생 보지도 못한
수백만의 동물과 식물들이 그 모양이 하나도 같지 않고 다른 것에 감탄을 하고, 그
수많은 동식물들이 제각기 독특하고 다른 삶의 방법으로 살아나가기 위해 하는 상
상을 초월한 행동들을 하는 것을 보면 감탄합니다. 그리고서 묻습니다.
역사상 어떤 뛰어난 과학자와 동식물학자들이 저걸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오직 있
는 방법을 골고루 분배하기도 어렵지만 그것을 누가 창의력으로 창조할 수 있단 말
인가? 오직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해답인 것입니다.

가디언 잡지에 어떤 분이 우주의 탄생에 관한 논문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처럼 가슴 벅찬 발견들을 보고 우주의 아주 극미한 부분이 지구가 대기라는
것을 부여받도록 정교하게 고안된 사실에 대해 나는 하나님께든 대폭발이든 둘
다에게든 전적으로 겸손하게 무릎꿇고감사드리는 것 외에어떻게 적절하게 반응
할 수 있겠습니까?" 지구에만 있는 대기 때문에 인간이 사는 것을 아신다면 누가
수많은 별들중에 지구에만 대기를 주었는가  생각할 때 하나님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의사는 아주 작은 입자들의 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단 하나의
세포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할 때 그들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세포의 복
잡한 활동들이 서로 조정되는 것을 볼 때 경외심과 겸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
니다.

성경은 분명히 인간이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은 볼 수 없지만 대신 만물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있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보이진 않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문이 온 세상 가득히 찍여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핑계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세상사람들이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과 영광
을 알 수 있다는 것이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다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이 자연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를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분명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보여줍니다.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을 구원하기는 충분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부정하는 인간을 정죄하기는 충분합니다.

그럼 왜 인간들이 알되 모른체 하는 죄를 짓습니까?
21절에 보면 하나님께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그 생각이 허망
하여 지고 마음이 어두어지고 지혜가 우준하게 되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경건치 않은 죄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해줍니다. 
하나님을 알았을 때 인간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해야했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인간은 그렇게 하길 싫어했습니다. 알면서도 모른체한 죄의 원인은 하나님
께 영광돌리고 감사하는 일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른체하니
그 결과 생각은 허망해지고 마음은 어두워지고 지혜는 우준하게 변했습니다.

그래서 바꾼 죄가 나옵니다. 바꾼 죄는 알면서 모른체한 죄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대신 우상을 만듭니다. 사람을 우상으로 만들어 모하멧이나 부처
나 문선명이나 각 이단들의 주인을 섬깁니다. 얼마 안 있으면 죽어 썩어버릴 인간
을 섬깁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자기 손으로 깍아만든 나무와 부어만든 각종 짐승,
뱀이나 용이나 사자나 짐승들을 우상으로 섬깁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우상을 섬길까요?
자기 자신을 섬기기 위함입니다. 우상을 섬기지만 그 사람은 자기를 섬기는 사람입
니다. 왜냐면 우상을 섬길 것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불교를
믿을 까 힌두교를 믿을까 또는 무신론을 가질까 아니면 무속을 믿을까를 자신이 결
정할 수 있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려면 인
간은 선택과 결정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그 외 모든 것은 피조물이므로
절대적으로 하나님만을 섬겨야 되는 것이 정해져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수동적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되고 그래서 복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게
싫다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결정해야지 왜 하나님 맘대로 해야하나, 왜 하나님
께 감사해야 하느냐, 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되느냐 하면서 거역하는 것입
니다. 그리고서는 자신을 믿거나 아니면 자신이 만든 우상들을 섬긴다고 하는 것입
니다. 그러나 우상숭배의 실상은 하나님을 섬기기 싫어하는 자기 자신을 섬기는 행
위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설교에 결론을 맺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왜 정죄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지옥에 가야하
는 줄 알았을 줄 압니다.  모른체 한 죄와 그 결과로 바꾼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반드시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죄의 본질은 경
건치 않은 죄와 불의입니다. 경건치 않은 죄란 하나님을 알되 모른체한 죄이며 이
죄의 결과인 영광을 바꾼 죄라 할 수 있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심판받고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곳은 불과유황못
으로서 세세토록 고통받는 끔직한 곳입니다. 구더기도 타지 않듯이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고통당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죄가운데 살았던 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표적이 되었던 자
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듯 우리는 죽게 되고 영원한 벌을 받을 비참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 죄를 해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지옥 형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안타깝
게도 이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죄되 마음을 갖고 죄성을 갖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없습니다. 아무리 선을 행하려고 하고 고행을 하려
고 해도 죄의 정욕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성철 스님도 열반송에
서 지옥에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시를 지었듯이 말입니다.

(복음설교)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죄인된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인으로 만들어주시
길이 하나 있습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어 죄 용서함을 받
아 진노에서 벗어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지옥형벌을 면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아니 그정도가 아니라 참 안식과 복락이 넘치는 천국시민
으로 정해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진노가 은혜로 바
뀐 자입니다. 감사하지 않습니까? 우리 한 번 진노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예수님께 성령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