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은 불타오르십니다.

by 김세열 posted Oct 26,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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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11:1-12 불타오르는 하나님의 사랑

지난 금요철야에는 부족함이 많은 저의 설교에도 한주간동안 은혜받았다고 격려해 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교역자들이 박수를 쳐주고 담임목사님이신 조목사님께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다음날 인터넷을 보니, 조사님께서 제 설교를 "명설교였습니다" 라는 제목하에 공개적으로 칭찬을 하고 설교문을 올려놓으시기 까지 하셨습니다. 분에 넘치는 격려를 받아서 참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내심 고무되었습니다. 그런데 곧 내 마음에  뭔가 어두운 구름이 한 조각이 비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 목사님의 글 마지막에 쓴 이런 문장 때문이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다음 주 금요심야기도회 시간에 김세열목사님 설교를 한 번 더 듣습니다.
보통 금요심야기도회는 교역자들이 돌아가면서 설교하게 되어 있습니다....그런데 한 번 더 설교하라신다.....이 의미는 무엇일까?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하, 조목사님이 명설교라고 칭찬하시더니, 한번 더 은혜로운 설교를 기대하신다는 뜻이구나 라고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주일 저녁인가 어느 집사님께서 제게 와서 하시는 말씀이 "김목사님 지난 금요철야 설교를 듣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번 금요심야기도회는 꼭 나가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제게는 이렇게 들렸습니다. "김목사님 이번 설교도 꼭 은혜로와야 되요. 제가 어렵고 힘들게 금요심야기도회 나가는 것이니 실망시키지 마세요." 그분은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지만 저는 혼자 
야 이번 설교가 진짜배기구나
"바야흐로 나는 명설교자가 되느냐의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도다"
지난 번에 설교에 은혜를 끼친 것이, 장님 문고리 잡은 것이나, 아니면 황소 뒷걸음치다 쥐잡은 일과 같은 것이었는지 아닌지가 이번 금요철야 설교에 판명이 나는구나! 오우 명설교! 마치 잠간 붕 공중에 떠올랐다가 갑자기 먹구름속에 파묻힌 기분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처음 내 마음에 어두운 구름 한 조각의 이유가 나름대로 명백해졌습니다.   

그런데 한 주간 동안 바빴지 않습니까?. 대각성 전도집회에다, 장애우가을여행에다가 성도님들 장례문상에다가 정신 없는데, 순간 순간마다 제 머릿 속에 떠오르는 3글자,  오우! 명설교
이번 금요기도회에는 무슨 설교하지, 어떤 성경본문이 명설교 본문이지, 고민하고 성경을 뒤척이는데 이제 웬만한 성경본문은 눈에 차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명설교 본문이 어디입니까? 어느 본문이 은혜로운 본문입니까?  그런데 아무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비몽사몽간에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려던 참에 드디어 마음 끄트머리에 하나님이 주시는 듯한 감동이 왔습니다. 
"너처럼 한심한 자가 목사된 것이 은혜란다. "설교에 은혜를 주는 것이 너냐, 아니면 나냐?  정곡을 찌르른 핵심이었습니다.
주님, 은혜는 주님이 주시는 것인데 한심하게 내가 은혜를 끼친다고 쓸데없는 염려했군요. 주님 전 참 한심합니다. 이것 말고도 한심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좋은 목사를 계속 시켜주시니 너무 감사하군요.  이거 너무 은혜롭군요. 그리고 사랑받을 자격없는 한심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여야 겠다는 생각에 오늘 본문을 잡았습니다.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길 바랍니다.

호세아선지자는 북 이스라엘이 최고 번영기인 여러보암 2세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왕을 정점으로 북이스라엘을 급속도로 멸망해 나갔습니다 결국 앗수르에게 멸망당합니다. 최고의 전성기에서 최악의 멸망까지 기간이 불과 30년 남짓이었던 격동의 시대의 선지자입니다.
호세아는 본문에서 멸망하는 북이스라엘의 죄를 탄식하면서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선포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였던 선지자입니다. 본문에서 그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이렇게 경고 하였습니다. 
1절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는 이스라엘인 야곱의 12아들을 비롯한 70명이 애굽으로 피난가서 지냈던 약 400년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의 시기를 말하는 것이 됩니다. 
그들의 수는 출애굽당시 장정이 60만이었으니 약 200~300만정도의 인구를 가진 무리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수만 많았지, 애굽의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건축일의 막노동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최고의 학문과 무예와 기술 전술등에 대한 전문 훈련을 받은 자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단지 노동을 위해 먹고 입고 힘에 겹도록 일하는 노예무리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이란 나라와 애굽인들에 비해서 무식했고 형편없었고 가난했고 한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불러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놓고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애굽인들중에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을까요?
1번, 애굽인들은 우상을 섬겼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이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문 2절에 이스라엘이 바알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에게 분향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인들보다 더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도 틀립니다. 하나님은 중심으로 보시지 외모를 보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3번, 애굽인들보다 이스라엘이 더 강하고 똑똑하였므로, 이것도 아닙니다. 
4번, 이스라엘은 아들이므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무식하고 가난한 노예집단을 더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간단히 대답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아들이니까.
하나님, 그래도 우상숭배하고 배은 망덕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이십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아들이니까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아들로 삼으셨습니까? 왜 애굽은 아들로 삼지 않으셨습니까?
그 때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내 뜻이다. 내것을 가지고 내 맘대로 할 권이 없느냐, 아들로 삼은 것에 전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제 아들녀석이 친구 몇 명과 함께 과외공부를 했습니다. 친구의 부모님에게서 과외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아들녀석의 말에 의하면 못하는게 없습니다. 공부는 반에서 1등입니다. 운동도 잘합니다. 조그만 녀석이 테니스를 배워서 테니스도 잘하고, 농구 축구도 잘한답니다. 헬스를 하는데 팔굽혀펴기를 70개나 한답니다. 우리 아들은 5개하는데 말입니다. 근력만 센게 아니라, 달리기도 빠르니 순발력도 있고, 기술도 있습니다. 게다가 예의도 바르고 의젖합니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그 부모님에 의하면 모든 일이든지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는 재능교육학생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은근히 부아가 나는데 눈치 없는 아들녀석은 헤헤 거리며 친구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자기가 그 친구를 탁구를 쳐서 이겼다고 합니다. 그게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그래서 제가 무려 12만원짜리 탁구채를 선뜻 사주지 않았겠습니까? 그래 뭐든 한가지라도 잘해라.
저는 제가 아들과 탁구를 쳐서 제가 지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농구를 해서도, 팔씨름을 해서도 제 아들에게 지고, 수학문제를 풀다가 제 아들이 저를 가르쳐주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제아들은 저를 이기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거의 없습니다. 얼마전에 제 키를 넘어선 것과 저보다 덜 빤질빤질 한 것 외에는 없습니다. 저는 뭐든지 제 아들에게 지고 싶습니다. 그것이 저의 마음이요 자녀를 두고 있는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 자녀가 가진 어떤 능력이나 조건때문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공부를 잘하면  여러분들은 무척 기쁘고 자녀가 사랑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것때문에 사랑을 거두진 못합니다.
또 여러분의 자녀가 착하고 의젓하다면 여러분은 자녀들을 기뻐할 것입니다. 또 여러분의 자녀가 참으로 순종한다면 여러분은 자녀들을 너무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라고 해도 여러분은 자녀를 결코 미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남의 집 아들이 여러분의 아들보다 더 착하고 똑똑하고 잘생겼다고 그 아들을 더 사랑하시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못나고 부족해도 남의 아들보다 내 아들이 더 사랑스럽고 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랑을 받을 자격과 조건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격 미달이고 진노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2절"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 점점 멀리하고 바알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는 세상의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착하지도 않습니다. 인격적으로 더 성숙하거나 우리의 성품이 더 온유한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탁월한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예쁜 외모와 건강미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고 우리를 향해 내 아들이라 불러주신다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아들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사실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어떤 때요? 알수 없는 고난이 왔을 때입니다. 남들은 다 괜챦은데 나만 어려움을 겪는 것 같을 때입니다. 남들은 건강한 때 나만 갑자기, 아니 우리 가족만 갑자기 다치거나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고 할 때, 하나님이 날 사랑하는 것이 맞나 그럽니다.
다른 사람은 사업해서 잘 벌고, 집사고, 좋은 차 사고, 더 넓은 집으로 이사도 가고 하는데 나는 늘 빚에 쪼들려 살고 하니, 하나님이 날 사랑하는 것 맞나 하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면 좀 안 아프게 해주거나 좀 사업이 잘돼게 힘 좀 써 주시고, 내 아들 좀 시험에 척척 붙게 해주tu야지 이렇게 무관심한 듯 내버려둘 수가 있나 불평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원망할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우상을 섬기는 죄악을 범한 것과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3절과 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4]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본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다시 이스라엘을 어린 아이처럼 비유하며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느냐면 마치 아버지가 어린 아들의 앞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을 가르치는 자상함으로 가르쳤고 그 아들이 걷다가 피곤하여 쓰러질 때면 얼른 그 팔로 안아 주시는 사랑으로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혹 밤에  아프면 밤새 옆에서 잠도 자지 못하고 물수건으로 이마를 덮어주며 치료해주던 그 사랑으로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자녀들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제가 상계동에 막 이사왔을 때쯤인 것 같습니다.  때 제 아들이 돌이 좀 덜 된 때였습니다. 지금 같은 여름 때인데 애가 계속 설사를 하는 것입니다. 뭐 약 좀 먹이고 물에 꿀 좀 타서 먹이고 하면 좀 나은 것 같더니 어느날은 비가가 억수로 쏟아지는 밤인데 한 밤10시부터 애가 울기 시작하는데 도무지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밤 12시가 가까워지는 데 애가 보통 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애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 때 우리 애가 서울역 뒤에 소화아동병원에 다녔던 것이 생각이 나서 무작정 그 병원을 향해 안 사람과 둘이 택시를 잡아타고 달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백병원에 가면 될텐데 했는데 그 때는 경황이 없었습니다. 응급실에 들어가서 이런 저런 검사를 하고 하는데 나중에 의사가 말하길 장이 꼬였습니다. 아주 위급합니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얼마나 놀랐는지........하여튼 거기서 날밤을 샜습니다. 다음날 오후3시쯤에 .나중에 그 장이 꼬인 것을 수술하지 않고 무슨 항문으로 액체를 강한 압력으로 삽입해서 장을 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애를 수술실 같은 곳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부모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더라구요. 왜그런지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 문앞에서 애가 언제 나오나 하고 기다리는데 장을 펴는 일이 시작되었는지 애가 자지러지게 우는데 너무 고통스럽게 우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내 장이 더 아팠습니다. 내 아내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고였습니다. 지금보면 한 아들녀석이 한 20분정도 울었는데 한 2시간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치료가 끝나고 들어가 아들를 보니 아들가 눈물이 맺혀서 자고 있는데 땀을 흘리고 실신한 듯 자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애처롭던지 ......
그런데 지금 그 아들은 예주만 사랑한다고 투덜대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것이고 저를 그저 무섭게 대하는 아빠로만 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도 항상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 때 사랑의 줄로 인도하였습니다.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고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던 사랑이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믿는 것이 참 힘들다고 말합니다. 왜 그러십니까? 뭐 하지말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먹지 말라는 것 많고 가지 말라는 곳 많고 하지말라는 것 왜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또 하라는 것도 많고. 완전 구속당하는 것야 인생 망치는 것이지. 마치 예수 믿으면 커다란 멍에를 메는 것 같이 여깁니다.

제가 놀기를 좋아해서 동서들 만나면 순 노는 프로그램은 제가 다 기획하고 스케줄 짜고 준비했습니다. 예수믿고 신학한다니까 제 동서들이 말했습니다. "재밌는 사람 하나 버렸네"
저는 버린 몸이 되었습니다. 왜 자기들과 함께 놀수 없으니까. 마치 예수믿으면 그 쪽에 굵은 동아리 줄에 얽매여 할 것 마음대로 못하고 사는 불쌍한 인생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줄이 사랑의 줄이라고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줄에 이끌려 가는 것은 도살장에 가는 소에게 얽어맨 줄이 아니라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되사서 살려주는 사랑의 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는 사랑의 줄을 아십니까?  요한 복음 6:44에 예수님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줄이 죄의 멍에 매여 끌려다니던 여러분들을 풀어서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는 말씀을 확신하시길 바랍니다. 
이게 사랑의 줄 아닙니까?
죄의 멍에를 풀어주는 줄이요, 지옥에서 건져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줄이요, 참 행복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줄이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목에 사랑의 줄이 매여있고 그 줄 한 끝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있는 한 그 무엇도 여러분을 지옥으로 이끌어 갈 수 없다는 사실, 여러분을 슬픔과 불안과 염려의 어두움 삶으로 이끌어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베푸신 큰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 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를 놓지 마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의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므로 하나님을 배역했지만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고난과 환란의 시기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여야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치료의 손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심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물러갔습니다.
7]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그 백성들은 마치 결심이나 한 듯이 아주 작심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저희를 불러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완고했느냐면 하나도 예외없이 완고하게 배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2절에 있듯이 점점 멀리 도망가더니 바알들에게 제사하고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습니다.
바알은 뭐 이래라 저래라하는 십계명이 없습니다. 그저 성적 쾌락을 주는 신입니다. 풍요와 번성의 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편합니까? 반면에 하나님은 얼마나 하라는 계명이 많습니까? 복만 줍니까? 잘못하면 저주도 있습니다. 그러니 바알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 신입니까? 그러니 하나님에 붙잡혀 얽매여 사느니 바알 신 믿고 살겠다고 뛰쳐나가는 것입니다. 그 뿐만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살기위한 보다 직접적인 도모를 했습니다. 그것은 6절에 보면 나오는데 저희의 계책을 인함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즉 계책을 꾸민 것입니다.
계책이란 인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계획하고 설계하고 모의하면서 하나님께는 불순종하고 반역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나라가 위급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이 계책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해서 어려움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계책을 철저히 무능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앗수르를 의지했지만 결국 앗수르에게 망해서 포로로 끌려가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렇게 계책을 세우며 도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줄을 멍에로 오해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향해 억지로 자기를 괴롭히는 존재로 여기며 마냥 얽어매서 못살게 구는 올가미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 이스라엘은 결심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자 이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그만큼 사랑하였는데도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그만큼 선지자를 통해 불렀는데도 패역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여전히 계속 사랑하실까요? 그리고 그 사랑의 강도가 약해지지 않을까요?
8절에 보면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는도다. "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을 어떻게 놓을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어찌 놓을 수 있느냐는 어찌라는 강조는 단순히 그들을 결코 놓지 않고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차원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의지보다 감정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당한 성읍입니다. 그 두 도시가 에브라임과 이스라엘과 비교되었다는 의미는 그 도성의 죄가 에브라임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멸망당해야 마땅한 성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그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 수 없습니다. 멸망당해도 마땅한 죄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절에 보면 하나님의 마음속에 죄악된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의 마음이 타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본성상 진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패역하고 배반하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맹렬하게 진노의 마음을 갖습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을 멸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얼마 못갑니다. 뒤집힙니다.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얼음장같이 차가운 진노 위에 당신의 자녀를 향한 긍휼의 불꽃이 피어납니다. 그 불꽃은 점점 더 타올라서 진노를 녹이며 불타오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긍휼의 불이 하나님의 온 마음에 달아오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와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바꾸고 다시 외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자같습니다. 마치 어미 사자가 집떠난 새끼사자를 부르듯이 포효하십니다.  그렇게 아들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너무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이 세상의 다른 사람보다 더 능력있고 의롭고 나은 것이 없을지 모릅니다. 아니 오히려 더 배은망덕한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이유는 바로 여러분을 아들삼았기에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넘어서며 계속적입니다. 그리고 식지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맹렬한 진노의 불길을 잠재우고 긍휼의 불길을 타오르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너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이 사랑을 부인하실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하지 않고 여러분을 마음것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불타오르는 주님의 사랑의 고백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뜨거운 품에 안기시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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