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해 예루살렘을 도망나오게 되었습니다(삼하16장).
다윗이 도망가는 길에 여러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중에서 베냐민 지파의 노인 시므이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시므이는 다윗 왕에게 저주를 쏟아 부으면서 조롱와 멸시의 말을 합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7~8절)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와 멸시를 들으면서도 맞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분명히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시므이를 죽이겠다고 하는 아비새의 분노를 오히려 누그러뜨리기까지 합니다.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10~11절)
다윗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벌어지게 된 수모와 조롱과 멸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솔직함과 권위를 내려놓음이 있었습니다.
주변에 나를 속상하게 하는 사건도 우선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린 자신의 잘못도 모르고 우선 다른 사람의 비난을 싫어하고 거절하기에 앞섭니다.
예를 들어서 접촉 사고를 냈으면 우선 내가 잘못한 것입니다.
그럼 상대방이 화나게 하더라도 가능한 인내하고 미안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면 우선 내가 실수했다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은 내가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나를 화나게 한다고 덩달아서 같이 맞대응하면 싸움만 생길 뿐입니다.
다윗은 사람에게 원망 불평하기 전에 하나님께 선처를 구하고 은혜를 구했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12절)
상대방에게 직접 맞대응하거나, 핑계를 대거나, 포장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후에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아버지의 후궁을 다 범해야 한다는 제안을 합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21~23절)
그 제안에 따라서 압살롬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백주 대낮에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악을 범하게 됩니다.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지도자들이 똑바로 서야 합니다.
특히 그의 말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책임은 큽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말과 책임은 그래서 큽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말과 행동을 하나님과 바로 직결시킵니다.
그만큼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욕보이게 하는 원인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