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비진의 의사표시

by 전영석 posted Oct 3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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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속임수를 법률용어로 '非眞意 意思表示' 라 합니다.
속마음과는 다른 허위의 말입니다.
그러함에도 사람들은 뻔히 알면서도 그런 類의 말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런 類의 말은 신뢰할 수 없는 관계를 만듭니다.
이런 類의 말은 관계를 파괴합니다.

예배는 'Service' 입니다.
어원은 servant, 종(노예)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 앞에 충직한 종으로서 무릎을 꿇는 행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정직한 종으로서 반응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을 主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종입니다.
여기엔 호칭의 어떠함의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한 종으로 서서,
말씀과 명령을 온 몸과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롬12:1).

非영적예배는,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아니하면서
  말로만 하나님의 종이라고 포장하는 것입니다.

거짓예배는,
  말뿐인 '예배의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속임수, 非眞意 意思表示인 것입니다.

  입술만의 거짓된 제사입니다.
  무늬만 그럴 사 한, 자기만족의 행위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섬기노라 하면서,
  자신의 영달과 이익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성전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들아,
    너희는 이것이 야훼의 전이라, 야훼의 전이라,
    야훼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온갖 더러운 짓을 하며 거짓 맹세를 하면서도,
    이 성전에 들어와서 감히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 하느냐?"(렘7:2-10)

예배儀式으로 고르반을 범하는 바리새인, 말과 형식뿐인 제사,
거짓예배에 대한 예레미야의 거룩한 분노의 질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두려운 심판의 외침입니다.

禮拜儀式뿐인 인생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사야 1:14)

하나님께서는 거짓예배를 가증히 여기십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이사야 1:13)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Logiken Latreian)니라" 하시며,

    몸과 영을 하나로, 말이 아닌 삶으로, 습관이 아닌 경건으로 드리는
    예배가 영적인 예배요, 진정과 신령한 예배라고 깨우치고 있습니다.

헬레니즘에 뿌리를 둔 靈知主義(Gnoticism)의 靈肉二分說이 지배하던  시대에,
사도 바울은 영과 육이 둘이 아닌 하나의 신앙을 외친 것입니다.

언어의 유희가 아닌,
온전한 삶이 참된 믿음인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방언과 신유, 신비한 환상이 가득함이 아니라
삶과 보여지는 예배의식이,  서로 다르지 않는 신앙이 신령과  진정의 예배입니다.

저는,
이 거룩한 영적예배를 서울광염교회 조현삼 담임목사님의 삶을 보며
목도하고 전율하고 있습니다.

영적예배란 합당한 예배, 합리적인 예배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걷는 합리적인
발걸음이 '영적예배' 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전 영역에서 예배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당 안에 갇혀있는 '예배儀式'은  아무런  능력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당 안에서 말로만 하는 예배의식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거짓된 예배인 것입니다.

말이 아닌 삶입니다.  살아 열매맺는 '행함' 입니다.

예배당 안과 예배당 밖에서의 언행이 다르다면,
그것은 거짓 예배행위일 뿐입니다.

예배당 안에서는 신앙고백을 하고
예배당 밖에서는 그 고백을 파기하는 삶에, 능력이 있을 리 없습니다.

예배당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삶의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全知全能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을 기망할 수 있을까요?

말로는 하나님을 위하고,
실제의 삶은 자기의 이름과 유익을 구할 때
우리는 거짓 예배행위의 罪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창세기 1장을 봅니다.
    "...., 그대로 되니라"
    "....,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된 것을 보시고 인정하시며 기뻐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곧 예배입니다.
말씀대로 되어지는 그것이 예배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삶의 현장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질 때
그때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곧 예배자로서의 무릎 꿇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에의 승리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삶,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말씀과 삶,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全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들을 지켜보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장)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6:7) 

보시고 좋아하시는 하나님,
보시고 지으셨음을 한탄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의 삶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예배와 집회와 교육과 훈련에의 참여,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면서 하는 기도들,
작정作心(40일, 等等) 하고 하는 기도들..., 무엇을 위함입니까?

도무지 죽지 않는 제 자신을 죽이기 위함인지,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위해 스스로 죽기 위함인지,
제 자신의 필요와  소욕을 쟁취하기 위한 祈福祈禱인지를 매일 돌아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자기 손으로 우상을 짓고
하나님을 버린 결과를 이 아침에 열왕기상 14:10-12 에서 또 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을 쓸어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버릴찌라.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하셨나니, 너는 일어나 네 집으로 가라, 네 발이 성에 들어갈 때에 그 
  아이가 죽을찌라"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다고 고백하는 예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나는 '새'도, 들에 핀 '잡초'도 하나님께서 입히시고
  보호하시고 먹이신다는 고백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 그것이 예배일 것입니다.

찬양(찬송) 합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 목숨, 이 생명 주를 위해 바치리다"..., 等의 다짐과 헌신과 서원의 수많은 찬양들....

정말 그러한지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정말 그렇게 살고 있는지 제 자신의 삶을 되새겨 봅니다.

말씀(설교)을 들으며,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눈물과 고백과 다짐과 서원"이 있습니다.

非眞意 意思表示,
  하나님께서 속아 주실까요?
  하나님의 마음이 좋으실까요?

목소리를 높이고 기교도 부리며 온 몸으로 하는 찬양이,
저는 두렵습니다.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하는 기도, 작정하고 하는 기도가,
저는 두렵습니다.

분위기에 휩쓸려 '아멘'을 따라하는 禮拜儀式이,
저는 두렵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흘리는 저의 눈물과 흐느낌의 祈禱도,
저는 두렵습니다.

    "...., 그대로 되니라"
    "....,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제 삶의 결산의 말씀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아픈 마음으로 오늘 이 아침에도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