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판단받는 것은 기쁨입니다.

by 김세열 posted Nov 1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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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공정한 판단

로마서 2:1-16

로마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사람들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그 죄는 바로 하나님을 알되 모른체한 죄요 경배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우상과
바꾼 죄였습니다. 이 죄에 대한 진노는 내어버려두는 진노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죄인들은 더욱 극한 성적타락에 빠졌고 온갖 더러움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있던 마음의 빈자리를 21가지의 온갖 악한 정욕과
죄악들로 가득차게 되었다고 바울은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강력하게 고발하는 정죄의 선언에 대해서
전혀 남들 이야기로만 듣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그리 나쁜 사람들이 있나! 세상에는 별의 별 추악한 사람이 많아!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지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1장에서 말하는 각종 악한 죄목들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에 관한 것이고 자기 자신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시대에 있어 이런 사람들이 누구였을까요?
첫째는 율법을 잘 지킨다고 늘 자부하는 하는 유대인들일 듯 싶습니다. 그러나
헬라인중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이방인 중에 자신의 고상한 철학을
자랑하며 고고한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인들중에
자신은 법 없어도 살만큼 의롭다고 자신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쨋든 자신은
의로운 자라 여기면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다 해당되는 것일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혹 이렇게 생각하셨던 분이 없습니까? 자신은 전혀 이런 추악한
죄와는 전혀 무관하게 살고 있으며 그런 추악한 죄를 짓는 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분들의 특징은 설교를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설교는 내 아내가 들어야 되는데... 우리 시어머니가 들어야 하는데. 내
남편이 들어야 하는데.... 저 김집사 박집사가 들어야 되는데. 좀 찔려서
회개해야 되는데....즉 자신은 전혀 설교를 들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눈에 온통  잘못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주위 사람들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을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정합니다. 여기서 판단은 건전한
평가보다는 의심과 정죄의 비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데 사도 바울은 2:1에탄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
바울의 선언에서 놀라운 것은 남을 판단을 하는 사람이 무론 누구든지 똑같은
일을 행한다는 선언입니다. 바울의 선언에서 조금의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론 누구든지'라는 말은 사람은 누구나 정죄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죄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죄인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죄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고상한 철학자이든 철저한
율법적인 유대인이든 죄인이라는 선언입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죄와 상관이 없을 듯한 사람들을 누구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요즘 세대에 존경받는 인물이 있습니까? 대통령이 존경을 받습니까 공무원과
정치인들이 존경을 받습니까 교수 교사들이 깨끗합니까 종교인들인 신부 스님
목사님들이 거룩하여 존경받습니까? 다른 종교인들, 적어도 신문에 보도된 것을
보아도 그들의 종교적인 죄를 예외로 해도 윤리적으로 죄가 있습니다. 목사인 저도
죄인이며 목사님의 세계에도 허물이 많은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텔레비전 드라마 '야인시대'에 나오는 종로패의 오야붕 김두한이 존경을
받을 지언정 사람들중에 없습니다.

제가 집에 들어올 때 가끔 저의 집은 온통 수라장입니다. 집이 적은 탓도 있지만
빈 집에 제 두 아이들이 먼저 학교에서 들어와서는 온통 어지럽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다른 날보다 더 심하게 어지럽혀져있었습니다. 아이들 방의 책상에는 온갖
잡다 것들로 빈뜸없이 수북히 쌓여 있었습니다. 나는 큰 애를 불렀습니다.
"야 책상꼴이 이게 뭐냐? 이렇게 하고 공부가 제대로 되냐? 좀 그 때마다
책은 책꽃이에, 연필은 필통에 제자리에 놓아라."그리고 설교준비를 위해서 제
방에 들어와서 제 책상을 보았습니다. 그 책상에도 펼쳐진 성경책과 주석책과
참고자료들이 너저분하게 펼쳐져 있었고 연필들이 뚜껑도 닫지않은 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넌 이렇게 하고 설교준비가 제대로 되겠냐?"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제자훈련하다보면 집사님들의 공통된 고백이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숙제를 미리
미리 하지 않는다고 날마다 나무랬는데 이제 보니 나도 마찬가지 라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남의 흉 한 가지면 내 흉 열가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 속담에는
"남을 향해 한 손가락을 가리키면 자기를 향해서 세 손가락이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도 인간이란 남을 비판하며 판단하는 그 일을 동일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정말 예외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남을 판단함으로서 자기 자신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포장하는 외식과 간교함의 죄악을 추가로 짓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남을 계속 판단하는 잘못을 범할까요?
첫째 이유는 판단하는 자와 같은 일을 행하는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스개 말로 "남이 하면 불륜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많이 먹는 것은 단지 식성이 좋을 뿐이고 남이 많이 먹는 것은 절제 못하는
돼지같은 짓입니다. 그런데 돼지에 대한 판단도 돼지입자에서는 억울한 오해라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실제 돼지는 돼지의 위장의 80% 이상을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뷔페식당에 가면 120%이상 먹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1-6절에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고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못 본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내가 잘못하는 것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한 10정도 잘못해도 1정도 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보여집니다. 반면에 남이 10을
잘못하면 10배로 확대해서 100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니 동일한 잘못을 하고도
남이 하면 100배 악한 일이요, 자신이 하면 1정도의 그럴 수 있는 실수이니, 남과
자신의 죄는 100:1입니다. 자신은 그럴 수도 있는 죄요 남은 절대 할 수 없는 악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남의 티는 들보로 보이고 자신의 들보는 티로 보이는 것이
죄악된 사람의 본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을 정죄하는 비판이 바로 자신이 타락한 죄인이라는 핑계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혹시 남의 잘못이 눈에 잘 들어오는 은사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성이 크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바랍니다. 내 속의 죄가 넘칠수록 남의 죄를 찾아 비판하는 능력이 뛰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죄를 범하는 둘째 이유는 3절에 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는 자는 하나님의 판단의 성격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의 성격은 2절에 보면 진리대로 되는 판단입니다. 5절에 보면
의로운 판단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그런데 남을 판단하는 자는 하나님의 판단이
언제나 진실되게 되어진다는 잘 깨닫지 못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하는 말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합니다. 힘세고 강한 사람이
우기면 우세한 판단을 받아냅니다. 도둑이 도둑잡아라 소리치는 것은 자신이
도둑이 아니라고 소리치는 속임수라고 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그게 통합니다.
공권력도 확실한 물적 증거가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분명히 알고
있어도 잘 모릅니다. 기억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면서도
아니라고 우기면 통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법대를 나와 수년간 공부하고 사법고시를 쳐서 합격을 하고 그 후
수많은 경험과 훈련을 통해 판사가 되어도 많은 재판에 오판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년간 복역을 하던 중에 진범이 밝혀져서 풀려나온 죄수 아닌 죄수도 있습니다.
또 재판이 지방법원에서 유죄 고등법원에서 무죄 대법원에서 유죄, 이처럼 평생
법리를 공부하여 사법고시를 패스한 판사들의 견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사람의
판단은 언제나 오류와 실수가 너무나 많은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유죄라도
증거없이는 무죄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즉 사실대로 정확하고 틀림없이 판단됩니다. 목소리 크고
힘센 것도 소용없고 사기 치고 거짓말을 해도, 외적 증거가 없어도 하나님의
진리대로 하는 판단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
입견이나 환경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의롭게 판단됩니다. 하나님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오판이라는 것이 1%도 없습니다. 하나님앞에서 누구라도
속이거나 감출 수 있는 일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의 두 번 째 특징은 3절에 보면 누구도 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대로 되고 의로운 판단이 있으면 불의한 사람이나 뭔가 캥기는 사람은
그 판단을 어떻게 해서든 피해가려고 합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재판받지 않으려고 멀리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범들은 국외로
망명을 떠나 재판을 피했습니다. 평생 숨어다닐 수도 있습니다. 최후로 재판받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어떤 사람도
시체를 법정에 끌고 나와서 재판하고 정죄하고 형을 선고하질 않습니다. 아무리
악독한 범죄인이라도 죽으면 그만입니다. 재판을 피해서 그의 죄목들이 추정될 수
잇으나 정확히 판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늘 끝에나 바다 속으로 숨어도
찾아내시며 죽음 후에도 판단하십니다. 그러니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의 세 번째 특징은 각자 행한대로 하는 판단입니다.
6절에 각 사람에게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라고 합니다. 악은 악대로 선은 선대로
갚아주십니다. 선을 행한 자에게는 영생으로 갚으시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갚으십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환란과 곤고를 당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한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선언과 지금
말씀처럼 행한대로 판단받는다는 선언은 정 반대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위라고 할 때에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해야 합니다.
보통 우리가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할 때의 행위는 구원을 얻기 위한
선행이나 율법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서 행위인데
우리는 결코 이 행위를 통한 구원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반면 행한대로
판단받는다고 할 때 행위는 믿음의 외적 행위들을 나타내주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서의 행위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의 열매인
것입니다. 즉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가 그 가진 믿음 때문에 자연히 나타나는
선한 행위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한
야고보의 말씀도 이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판단은 각자 행한대로 판단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 우리 부모님이 신앙이 좋으니 나도 복을 받겠지. 아니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우리가정이 교회에서 착한 일 많이 했으니 나도 칭찬을
받겠지"라고 은근히 생각을 합니다. 어느 분은 내 아내가 신앙이 깊으니 천국갈 때
마누라 치마끈만 꼭 붙잡으면 틀림없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있지만 반드시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묶어서 하는 법이
없습니다. 서울광염교회 1000명을 놓고 전체적으로 구원받고 상점은 평균
90점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별로 주어집니다. 우리 가정을 통째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별로 판단합니다.
부모님의 선한 행위를 자기에게로 돌릴 수도 없고 아내나 남편 것이라도, 자녀의
것이라도 조금도 자기의 것으로 빌려줄 수 없습니다. 각자가 행한 믿음대로, 충성한
대로 정확하게 받는 것이 하나님의 판단인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판단의 성격은 외모를 보지 않는 판단입니다.
11절에 보면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즉 하나님의 판단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동일한 판단 기준을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장사꾼에게 저울이 두 개 있었습니다. 왜 두 개였느냐면 물건 살 때의
저울과 팔 때의 저울을 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실제 무게보다 가볍게
나가는 저울은 살 때 쓰고 실제 무게보다 더 무겁게 나가는 저울은 물건을 팔 때
쓰는 것으로 이익을 삼는 것입니다.
외모라는 것은 사람의 생김새로 잘생긴 것 못생긴 것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인종과 출신을 말하기도 하며 학력과 재력과 권력 등을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초대교회의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별은 당시에는 커다란 외적 요인이었습니다.
율법을 받았고 구원자를 약속받았으며 하나님의 선민, 선택된 족속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은 놀라운 특권을 가진 것으로 자부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남다운 대접을 받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엄한 판단을 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정죄의 저울이 작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결코 외모로 보지 않는다는 사도 바울의 선언은 참으로
충격적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범죄인이 무전 유죄 유전 무죄라는 말을 만들어 냈습니다. 돈 있는
사람은 무죄가 되지만 돈이 없으면 죄가 없어도 죄인되는 세상이라는 한탄섞인
말입니다. 즉 재판의 결과가 돈 있는 자와 돈 없는 자에 따라서 다른 판단 기준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정치인이나 국회의원들은 웬만큼
죄를 지어도 다 집행유예로 나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중엔 작은
죄질로도 구속되어 형을 받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다 외모가 재판에 반영된
결과입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울 때에 분명히 하나님은 중심을 본다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은
이렇게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이같은 하나님의 판단 성격을 모르기
때문에 남을 판단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남을 계속 판단하는 자는 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오해하는 자들입니다.
4절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케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분명히 하늘에서 날벼락이나 불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습니다. 이것이 죄책감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그들은
대범해집니다.  그들은 계속 남을 정죄하면서 자신은 죄를 짓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남을 정죄하는 자들의 죄 위에 바로 날벼락을 떨어뜨리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은 진노를 쌓으시되 한편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납하고 오래동안 참으시며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는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와 오래참으심을 모른 채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고집을 피우며 계속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신 배려를 멸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인간의 전혀 외적인 것을 고려하지 않고 그가 하나님께 행한대로
판단하며  진리대로 판단하며 의롭게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결코 이 세상의
누구라도 이 판단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학생들은 공부한 것을 시험을 치면서 평가를 받습니다. 매학기
매년마다 시험을 봅니다. 그래서 얼마나 성실하게 공부하였는가 얼마나 아는가,
또는 얼마나 진보했나에 대하여 평가를 받습니다. 대선이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능력과 정책구상과 도덕성 등으로 국민의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언행과 행보 하나 하나, 아니 그와 관계된 과거의 모든
행적도 평가받습니다. 그의 자녀들도 평가의 대상입니다.  온 국민의 시선이 쏠려
있고 평가받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인생에 책임져야 할 존재입니다. 우리는 남을 판단할 자가
아니라 판단 받을 자들입니다. 나의 모든 삶에 대하여 정확하고 분명한 평가회가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이세상의 사는 동안 모든 일,
행위와 마음속의 은밀한 생각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판단 받게 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판단할 자로 살기 보다 판단받을 자로 살아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면서 산다면 우리는 정작 내 자신이 칭찬받을 만한 판단받기 위한 준비를
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은 두번 기회가 없는 삶입니다. 따라서 대충 대충 살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루 한 시간 일분 일초도 정확하게 평가받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의 성격을 분명히 알 때 우리는 또 은밀한 죄라도 짓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죄라도 그 날에는 밝은 대낮보다 더
환하게 드러납니다.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믿음과 선행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열심히 주를
섬기며 최우선으로 주를 위해 예배하며 전도하며 봉사하십시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전혀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리대로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날에 약속하신 존귀와 영광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여러분에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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