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들일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하면 풍성합니다

by 이도수 posted Mar 03, 200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본문: 눅9:7-17
제목: 내가 하겠나이다(부제: 빈들일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하면 풍성합니다)

사람이 당황할 때가 언제인가요?
여러분도 당황할 때가 있으시지요?
새벽기도 하시러 집에서 오시든지, 가시든지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특히, 목사를 만났을 때 아주 당황해 하시더군요.
화장을 안하고 맨 얼굴로 대하는 것이 부끄럽다고들 하십니다.
그러나, 목사인 제가 보기에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일부러 눈썹을 그리지 않았어도 송송이 박혀 있는 까만눈썹,
쌍꺼풀진 눈은 그 눈대로 이쁩니다.
쌍꺼풀지지 않은 눈 역시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맨 얼굴에다가 눈물, 콧물 뒤범벅되었던 얼굴을 보아도 그렇게 이쁠 수가 없습니다.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마구 달아나는 모습은 더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당황해하지 마십시오. 그냥 얼굴을 드러내십시오.

어린 시절 몰래 성적표 숨기고 다니다가 엄마한테 들켰을 때,
숙제 안 해갔는데 그 날따라 숙제 검사를 확실하게 할 때,
당황할 때는 대개 잘못했을 때,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죄도 짓지 않으신 여성도님들 너무 당황해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심히 당황하였습니다.(7절)
헤롯은 자신의 죄가 기억났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이 모든 일을 듣고" 당황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란 무엇인가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시고 말씀을 전파하시며 앓는 자를 고치는 이적들을 말하며(눅9:1-2)
제자들까지도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는 이적들을 말합니다(6절).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병에서 놓임을 받고
귀신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당황해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당황해 했습니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였던 사람입니다.
동생의 아내를 취했다는 것을 책망했던 세레요한을 옥에 가두었다가
헤로디아의 딸의 춤의 댓가로 세례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오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진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죄악을 은폐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빛이 나타나면 이런 반응이 나타납니다.
빛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숨을려고 합니다.
빛을 차단하려고 합니다.
빛에 자신을 노출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헤롯이 지금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헤롯은 "이 사람이 누군고 하며 저를 보고자"(9절)하였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과연 어떤 분이시길래 그런 놀라운 이적을 행하는가?
나도 그 분을 만나서 나의 문제를 해결받고 싶다.
그리고, 나도 그 분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싶다"라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를 한번 만나보고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하겠다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의 기준이고 판단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교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헤롯의 태도와는 다른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태도는 모든 행한 것을 예수님께 가지고 와서 고했습니다(10절).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10절)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께 감출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실수와 잘못도 고백했을 것이고 놀라웁게도 병이 낫고 귀신들이 쫓겨간 이야기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다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가 행한 것들을 다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이 즐겁고 기쁜 일이든지
아니면, 죄악이든 실수이든 나쁜 생각이든지 간에
그런 것들을 다 고백할 때에 진정한 힘이 나옵니다.
우리가 솔직할 때에 힘이 있습니다.

영화 라이어 라이어가 생각이 납니다.
한 편의 영화 이야기이지만 진실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알려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뱀처럼 지혜로울지라도 비둘기처럼 순결하지 않으면 힘이 없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판단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헤롯과 같이 판단의 기준이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 제가 이런 이런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을 주님께서 판단해 주십시오"
"이런 일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이 부분은 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까 실수한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판단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헤롯이 생각했던 것처럼 탐색하고 판단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믿음의 대상이자 판단의 기준이 되십니다.

여러분의 판단의 기준이 예수님이시길 바랍니다.
말씀이 여러분의 생각의 기준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생각하시고 판단하시는 여러분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수요일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서 비전하우스로 전화가 왔습니다.
"대구 상황이 어떻다고 하지?" 조목사님의 목소리였습니다.

"아, 예, 많이 어렵다고 하지요"
"대구에 내려가 봐야 하지 않겠어?"
"예, 대구를 요. 지금 가서 뭐 할 일이 있을까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프랭카드 몇 장 빨리 만들고, 교회차에는 지금 봉사단 글씨로 썬팅해서 선발대로 내려보내"
"같이 올 사람들 있으면 함께 오고, 이런 상황들을 인터넷에 공지 좀 하고"

조목사님 일행은 속초에서 서울로 올라오다가 대구로 향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대답한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13절)

"목사님, 지금 내려가서 할 일이 없지 않습니까?”
내가 한 말이 꼭 제자들이 예수님께 한 말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목사님께서 차의 기수를 대구로 돌리고 나서는 한 마음으로 함께
대구를 위해서 기도하고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했습니다.
물건을 챙겨서 보내드리고 인터넷에 공지하며 연락을 수시로 취하면서
만일의 비상사태로 대기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3절)

조목사님은 먹을 것을 주려고 달려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요구하시면서 "너희들이 행하여라"하는 명령에
순종하면서 달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렇게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서 과연 할 일이 있을까?"
"이미 중앙로역은 다 철수하고 차량도 옮겨졌을 텐데"
"수해지역처럼 수해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과연 할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봉사단이 대구에 내려 갔을 때에, 봉사팀이 할 일을 주님께서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김해나 강릉처럼, 컵라면이나 음료수를 제공하는 것은 이미 다른 팀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복구하거나 힘을 쓸 것도 없었습니다.
모여진 봉사팀에게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치약과 칫솔, 속옷, 휴지들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수요일 밤에 전화가 왔습니다.
김세열목사님께서 지금 대구로 내려오시니까 창고에 있는 속옷을 챙겨서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수요예배를 마치고 들어와서 새벽기도회 말씀을 막 준비하려던 차였습니다.
급히 옷을 챙겨 입고 창고로 달려갔습니다.
필요한 옷들을 챙겨서 23박스를 남양주광염예수봉사단차에 실었습니다.
집에 오니까 1시가 다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훨씬 가볍고 기뻤습니다.
대구에 있는 봉사단에도 도움이 되고 그곳에 있는 이웃들을 섬길 수 있는 물품을 챙겨서 보냈다는 기쁨이 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200만원, 300만원을 들어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몇 억이 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먹을 것을 주는 일을 행할 때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김해, 강릉, 목유사, 대구에서 그랬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봉사 현장에서만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아니, 일어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주님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라는 제자들의 대답.
이 대답이 평소의 여러분의 대답이 아닌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 저 인간이 나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나는 용서할 수 없나이다"
"주님, 말씀대로 사는 것도 좋지만 사장님에게 잘 보이지 아니하고는
승진할 수 없나이다"
"주님, 내가 부장급 이상이 되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나이다"
"주님, 남편이 나에게 먼저 해주지 않고서는 나도 잘 해줄 수 없나이다"
"주님, 내가 돈이 최소한 이 정도는 있어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모험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주님,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내가 하겠나이다"
"주님, 내가 가진 것으로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주실 것을 믿고 내가 하겠나이다"
"주님, 나의 벤댕이 속만도 못한 마음으로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겠나이다"
이런 믿음의 고백이 저와 여려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결코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12절)고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있는 곳이 빈들일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그 곳은 풍성하여 질 것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빈들일지라도 풍요로운 땅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그곳은 풍성하고 풍요롭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이라면 풍랑이 있는 곳도 안전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어디라면 그곳이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될 것입니다.
돈을 많이 가진 것이 안전한 것이 아니라,
전쟁 위험이 별로 없는 선진국으로 이민가는 것이 결코 안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정에서도 내가 행하는 작은 섬김이 있을 때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때로는 남자들도 설거지 하고 청소도 할 때에 가정이 회복되는 기적이 있습니다.
여자들은 한 마디 사랑과 칭찬으로 남편과 자녀를 세워줄 때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직장에 내가 먼저 출근하고 섬기고 한 발 먼저 나아갈 때에 기적이 있습니다.
사업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경영방법대로 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희생과 헌신이 있고 사랑의 수고가 있을 때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술자리에 초청받는 과장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술자리에 초대받는 크리스챤이십니다.
술은 드시지는 않지만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잘 만드실 뿐만 아니라
술자리가 끝나면 곤드레 만드레 취한 동료들을 다 챙겨서
자신의 차로 집에까지 일일이 데려다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3절)

"주님, 이렇게 이렇게 하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나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이 없지만, 내가 사랑이 없지만, 내가 풍성히 갖고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의지하고 내가 하기를 원합니다."

남아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먹을 것도 많지 않지만
그것을 나눌 때에 하나님의 큰 역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빈들일지라도,
그곳에 예수님과 함께 하시면 풍성하고 풍요로울 것입니다.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는 막막한 빈들일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하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내가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열두 바구니를 남게 하시는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