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책임, 그리고 사랑

by 이도수 posted Mar 0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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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자유와 함께 책임도 갖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의지와 결정대로 하게 했지만 그만큼의 책임도 물으셨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 노예제도나 일부다처제와 같은 인간의 악한 죄성에서 만들어진 제도들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7년째 되는 해에는 종에게 자유를 주게 하는 책임도 주인에게 갖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보면, 사람을 죽인 자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죽어야 했습니다. 부모를 때리거나 저주하는 자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서로 다투다가 다치게 했으면 책임을 지고 손해배상과 치료비를 보상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라는 율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만큼 책임지게 했습니다. 학자들은 이런 유형의 법을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보복법이 아니라 보호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야이! X라고 욕을 먹었으면 어떤 욕을 해주고 싶나요? ‘야이, X 제곱아라고 더 센 욕을 해주고 싶을 겁니다. 한 대 맞았으면 몇 대 때리고 싶나요? 최소한 한 대 이상은 때려주고 싶을 겁니다. 다른 사람의 차를 긁어서 흠집이 났는데 생각보다 수리비가 많이 나왔다면 어떻게 하고 싶나요? 찾아가서 상대방 차를 박살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인간의 악한 본성입니다. 적대국에서 대포 10대를 구입했다면 몇 대 가지려고 합니까? 그리고 핵무기 10개 가지면 몇 개를 가지려고 하니까? 인간에게는 그 이상으로 갚아주고 싶은 악한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악한 마음을 아시고 눈에는 눈, 이는 이,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라는 율법을 주시면서 때린 만큼만, 상하게 한 만큼만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악한 마음과 감정으로 더 크게 보복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율법이 만들어진 당시 고대사회는 공명정대한 사법제도가 제대로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눈을 다치게 한 사람의 생명도 빼앗거나, 한 사람의 생명 때문에 부족 간의 싸움이 벌어지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복수극이 과열되는 것을 방지하고, 범죄와 형벌에 있어서 형평성을 가르치고, 복수심을 다스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의 스토리를 아실 겁니다. 안토니오가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으로부터 돈을 어쩔 수 없이 빌리게 됩니다. 그리고 돈을 갚을 수 없을 때에는 자기의 살 1파운드를 떼어준다는 증서를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안토니오는 약속했던 날짜에 돈을 갚지 못하고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때 지혜로운 재판관이 '살은 주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고 판결함으로써 악한 샤일록은 패소하여 재산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인간의 사악함을 잘 그린 희극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38~4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사랑으로 승화시켰고 완성하셨습니다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이 말씀을 적용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동해보복법을 적용했다면 우리의 모든 신체 부위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뽑히고, 잘려지고, 사라졌을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영원한 멸망에 던져지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모든 죄를 감당하게 하시고 죄값을 갚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하셨다니, 이 얼마나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은혜입니까? 이제 우리는 자유로운 삶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보다는 자유를 어떻게 잘 사용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5:13)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을 묻기 전에 사랑을 보여주셨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7~11) 하나님은 종되었던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를 책임있게 사용하며 사랑하는데 사용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여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