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불냄새와 예수님

by 이윤정 posted May 23,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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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21:1-15
제목 : 숯불냄새와 예수님

  베드로가 제자들을 이끌고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드러 내 놓고 "이제 우리가 이곳에 모여있어봤자 별 볼일이 없어. 우리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는게 어때?"라고 설득했다는 성경구절은 없습니다. 그는 간단히 말합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열두 제자들중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인정한 리더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성품은 리더의 독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탁월한 고백을 했던 자였습니다. 언제나 예수님곁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사랑받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때에 자신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맹세하였던 쓰라린 마음을 안고 그가 원래 하던 일터로 돌아가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어도 그에게는 이제 앞장서서 주를 따를 면목이 없었습니다. 의욕이 없었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는 실패자였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제자들을 끌고 가고자 했던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베드로의 뒤를 따라 간 것을 보고 저는 참 재미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이미 부활하신 후였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손과 옆구리의 자욱을 보여주신 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들을 이끌고 같이 주무시고, 식사하시고, 가르치시던 때와 같이 제자들과 함께 육체적으로 생활하시지 못하셨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은 베드로를 리더로 삼아 그의 행동을 그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따르는 제자들을 볼 때에 저는 우리들도 리더에 목말라 하고 있고, 리더를 따라 쉽게 행동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정된 리더의 행동은 때로는 절대적으로 영향력을 갖기도 합니다.

  큰 단체에는 반드시 강력한 리더가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위력은 참으로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까이에서 따라 할 수 있는 리더를 원하고 있습니다.
적당하지 못한 리더들로 인해 오합지졸인 단체들이 이끌어지고 있는 것을 수도 없이 보게 됩니다. 안타까운 시대입니다. 어설픈 리더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것과 같이 엉뚱한 방향으로 인도할 때에 누가 바르게 인도할 수 있을까요? 그런 위대한 인물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저는 위대한 한 명의 리더가 될 수 없을 지 몰라도 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작은 그러나 진실된 리더들이 이곳에서 만들어 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바로 작은 예수들인 우리, 복음으로 무장된 우리, 십자가의 도라는 진리를 소유한 우리들이 리더가 없어 목말라하는 이 시대에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누구를 리드합니까? "우리에게는 따르는 어떤 단체가 없습니다"라고 대답 할 수 있겠는데요, 한 명이라도 갈 곳 몰라 하는 영혼이 우리 주변에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생명을 전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서울광염교회 성도님들이 복음을 소유한 진실된 리더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예! 베드로를 따라가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날이 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이 때에 한 사람들이 충고합니다. "그물을 배 오픈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밑져야 본전이다 하고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어~~ 이상하다 이거 한번 있었던 일인데 요한이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사건이 기억났습니다.
옛날 처음 예수님께 부름을 받은 그 날도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나 잡은 것이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셨었지요.
그래서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았었던 것이 기억이 났습니다.

  요한이 얼른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주시라"
그러자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얼른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바다로 뛰어내려갔습니다.

  요한복음이 요한의 기록이므로 우리는 요한의 시선을 따라서 이 장면을 보게 되지요.
얼른 베드로를 따라 요한과 다른 제자들도 작은 배를 타고 그믈을 끌고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자 요한의 눈에 뭐가 보였는지 9절 같이 읽어볼까요?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이 있고, 떡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준비 해 놓고 계신 것이지요. 사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이 세팅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러 이곳으로 온 이유는 그가 더 이상 해야 할 어떤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여동안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고, 예수님 죽음 이후에 무엇을 하라고 가르쳐 주셨지만 그에게는 지금 딱히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런 방향도 계획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현재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다가 참혹한 패배를 맛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의 뒤를 베드로와 요한이 따랐습니다. 요한은 대제사장과 알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베드로는 문밖에서 있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의 종과 하속들이 추위 때문에 숯불을 피우고 쬐고 있었고,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숯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피워놓으신 숯불냄새를 맡으며 젖은 옷의 찬기가 숯불로 인해 줄어들면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요한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을 모른다하고 세 번째로 저주하며 부인하였던 그 때 닭이 울었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셨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자신은 절대 예수님과 함께 죽는데까지 가겠다고 했던 것과 예수님께서 닭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 하셨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더 이상 그곳에 있지 못하고 베드로는 밖으로 뛰어나가 통곡했습니다.

  예수님이 피워놓으신 숯불냄새와 그때의 기억, 예수님의 눈빛과 목소리 이 모든 것이 베드로의 마음속을 소용돌이 치며 식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러 간 것이 당연한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소명감은 "주께서 나에게 일을 맡기셨다.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확신입니다. 베드로는 분명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그의 소명감은 자신의 초라한 모습으로 인한 실패감으로 인해 사라져 있었던 것입니다.

  처연한 마음, 부끄러운 마음의 베드로는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숯불냄새와 온기속에서 갈릴리 호수가에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은 베드로가 이전에 했던 것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현재 마음을 묻고 계십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의 대답은 그가 얼마나 오래 괴로워했는지 반영해 주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미 저의 괴로운 심정 사랑하는 주님을 따르지 못했던 제 마음을 마시지요. 저는 주님의 사랑보다 이렇게 나약한 사랑이지만 그래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렇게 예수님은 두 번을 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십니다. 새로운 소명입니다. 베드로의 나약함을 이미 보셨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주신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베드로는 궁금한 것이 있었어요. 참 재밌죠? 베드로가 말합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갔던 요한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는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이 갈릴리 (디베랴) 바다에 상심한 베드로를 위한 무대를 꾸며놓고 계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저에게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상심하고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느낌이 들 때 펴보고 위로를 받게 되는 말씀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무척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고백하고,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자신감이 커져갈 때에 그 때에 우리에게 오는 시험, 환란 가운데 쓰러지면 그만큼 우리의 믿음생활에 있어서 타격이 큰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계속적으로 기억되는 숯불냄새가 나는 자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냄새와 그 온기와 느낌은 강하게 우리의 뇌에 기록되어 있어서 때때로 만져질 듯 느껴지곤 합니다. 우리를 끝없이 정죄하고 괴롭히고 나약하게 만들지요. 그래서 회복시키기 어렵게 만듭니다.

  우리의 강력한 라이벌인 사탄은 우리의 숯불냄새의 자리를 너무 잘 기억하는 것 같아요. 교회에서 새로운 일을 맡길 때,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무언가 해야 할 사명이 있을 때 우리는 힘이 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자괴심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베드로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의 방식은 그래서 너무 멋진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괴로워 하는 그 순간의 느낌을 그대로 재현해서 베드로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괴로웠던 그 순간의 기억들 그 내음들이 예수님과 함께 섞이고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채취가 되도록 베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고치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가장 괴롭고 힘들었던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그때의 느낌도 기억하십니까? 그때의 장소도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그때에 외롭고 괴롭고 절망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께서 거기에 계셨음을 아십니까? 베드로가 배반했을 때 눈이 마주쳤던 예수님의 눈빛은 원망과 분노의 눈빛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실패의 순간에 그 자리에 분명 여러분과 함께 계셨을 예수님의 눈빛도 분명 비난과 멸시의 눈빛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의 순간, 또는 우리의 실패의 순간에 우리는 늘 동행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지,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하나님과 멀어질 것인지를 아시는 예수님의 중보의 기도와 측은히 여기시는 시선이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죄짓는 순간, 또는 실패의 순간에 예수님없이 홀로 외롭게 남겨졌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그러나 오늘 베드로를 향하신 예수님의 만지심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실패로 인해 주님의 일을 멀리하고 베드로처럼 고기 잡으러 가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상한 심령을 만지시며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고 새 사명을 맡겨 주시는 음성을 이 시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 '나같이 못난이가...'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반하고 멀어져간 베드로를 보신 후 십자가를 지실 때에 그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새 사명을 맡겨주셨던 것처럼 이미 우리를 위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십자가에서 지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을 어떠한 죄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분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회개는 받아들여 졌고, 우리의 부족함은 용납되었으며, 우리의 상한 마음은 치유함을 받을 것입니다.

  이제 때때로 맡게 될 숯불냄새와 그 온기는 우리를 나약하게 하는 절망케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러한 부족한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셨으며, 다시 사명을 맡겨주신 주님의 선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 숯불을 사용하셔서 생선을 구우시고 베드로와 제자들을 먹여주시는 멋진 분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괴로운 기억은 오히려 주님의 은혜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날마다 치유되며, 날마다 사명감을 새롭게 하고 기쁨으로 주님의 일을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