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달라도(마11:2-15)

by 이석진 posted Feb 07,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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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부분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무엇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힘든 건가요? 저는 제 생각과 하나님이 주신 결과가 다를 때가 아닐까 합니다. 참 많은 경우 제가 정말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 엉뚱한 결과를 가지고 올 때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봅니다. 전 청년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지도하면서 대학을 다니다가 멈추고 다른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런 과정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기도하며 결정한 곳의 진로를 바꿔야할 때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올해도 한 청년이 기도하면서 가고 싶고, 또 하나님이 확실하게 응답을 줘서 한 대학만을 지원했는데 되지 않았습니다. 이럴 경우 오는 허탈감과 박탈감은 사실 생각보다 큽니다.

  오늘 이와 같은 환경에 놓여 있는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이름 자체에서 느끼는 무게가 있습니다. 경건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했고 불같은 말씀을 전한 모습이 세례 요한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느껴지는 이미지 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메뚜기를 먹고 살았습니다. 오직 그는 메시야가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데 그의 일생을 다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영화 한 편 보고 싶은 욕구조차도 용납하지 않았을 것 같은 이미지를 주는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슨 낙으로 인생을 살았을까? 오실 메시야를 예비하는 낙외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그가 예수님께 세례를 줄 때 얼마나 큰 희열을 느꼈을까요? 메시야가 나에게 세례를 받다니...그래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런 그가 헤롯왕에게 옳은 말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세례 요한의 관심은 밖에 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메시야의 사역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지금 자기가 옥에 갇혀 있는데 이제 빨리 그의 올바른 사역을 해야 할텐데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냅니다. 2절입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요한은 옥에서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있었습니다. 듣고 있으면서 궁금했기에 제자들을 보내어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것은 다른 말로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아니면 더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귀를 기울여 무어라고 대답할지 기다립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5절에 있습니다. “소경이 보며....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우리는 5절을 볼 때마다 이사야서에 예언된 바로 그 분이구나 하며 기뻐합니다. 이미 예언된 메시야가 그대로 사역을 하고 있으니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5절의 그 말씀은 이미 그들이 듣고 있는 소식과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해 오시던 일은 그들도 듣고 있었습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답은 “조금만 기다려. 이제 곧 움직일 거야. 지금은 단지 하나의 예비 모임에 불과했어. 내가 메시야이니까 조금 더 있으면 로마 군병들을 다 물리칠꺼고 세례 요한도 감옥에서 꺼내줄께”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은 지금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말과 그들이 봤던 내용을 다시 반복해서 듣는 것 이상의 소득이 없었습니다. 요한이 그의 신을 들기도 황송하다는 그 메시야라는 확신을 갖게 하신 그 어떤 것도 알려주질 않았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제 우리 스승은 죽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던 이야기를 반복하시고는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은 것도 아닌 요한이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그 제자들에게 “나로 인해 걸려서 넘어지지 않으면 행복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실족하다는 의미는 돌 같은 것에 걸려 넘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라니요...

  예수님은 이런 요한을 두고 혹이라도 사람들이 요한이 믿음 없는 자이고 예수님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군중들이 여길까봐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을 해줍니다. 요한은 선지자이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까지 얘기를 해 주십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그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그가 메시야라는 것을 안 사람입니다. 다만 요한이 생각한 메시야에 대한 오해를 좁히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은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마땅히 이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일의 진행 과정과 결과가 그렇지 않아서 실망스럽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맞나하고 고민하십니까? 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능력 있고 힘 있게 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저는 욥기의 가장 핵심이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 지에 대한 설명이라고 믿습니다. 저희 교회 청년 중에 그런 말을 하는 청년이 있습니다.

  “욥기에서 자녀들을 잃고 재산을 다 잃은 후에 나중에 다시 자녀들과 더 많은 재산을 주시는데 오히려 더 많이 주지 않으셔도 그냥 처음부터 자녀를 잃지 않고 재산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욥에게 더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렇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큰 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어려운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사실 이 구절은 신약성경에서도 가장 어려운 본문 중에 하나입니다. 침노한다는 것의 의미는 말 그대로 “쳐서 빼앗는다”는 말의 뜻과 힘 있게 왕성하다는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천국에는 미래에 우리가 들어갈 천국이 있고 또 현재 우리가 이 땅에서 누려야 할 천국이 있습니다. 마태복음(4:12-17)과 마가복음(1:14)을 보면 요한이 잡힌 때부터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난 후에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천국에 대해 말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앞의 내용과 연관해서 이것을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천국은 힘 있고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고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세례요한보다 큰 자 같이 될 것이고 이 땅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르므로 즉,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사람은 그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즉 예수님으로 인해 천국이 왔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따르는 자는 실족하지 않고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천국을 이 땅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의 형편이 도저히 예수님을 인정하고 따를 수 없는 상황이어도 여전히 예수님은 예수님이 하실 일들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나님께 독립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신뢰한다는 것, 믿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때에도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저는 중국에서 서커스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네 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책을 읽다가 그네 서커스에서 연습하는 내용을 보고 감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자와 잡아 주는 자의 특별한 관계 때문입니다. 관중 위로 몸을 높이 날리는 그 대담한 사람은 그네를 잡은 손을 놓고 그저 팔을 뻗은 채, 잡는 이가 공중에서 강한 손을 잡아채 주실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나는 자가 잡아주는 자를 절대 잡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자는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기다려야만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천국을 침노하는 자라는 사실을 다시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다른 것 같아 앞이 보이지 않아도 그 분의 말씀에 따라 침노하며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실족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귀 있는 자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