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 8:22-25)

by 이석진 posted Mar 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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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본문입니다. 이 내용은 마태, 마가복음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 본문입니다. 저는 본문을 읽다가 2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배를 타고 가자고 하신 분이 예수님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별로 큰 발견이 아닌 것 같지만 제게는 큰 발견이었습니다. 마태, 마가복음의 내용을 봤더니 역시 예수님이 먼저 배를 타자고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이 내용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먼저 배를 타자고 하셨다는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계신 모든 성도님들 중에 본인이 원해서 이 땅에 태어나신 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서의 생을 시작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인생입니다. 청년부 예배 시간에 말씀을 나누다가 시편 139편을 통해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139편 중에서 제 마음을 잡았던 것은 13절에 있는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하는 부분입니다.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다” 나를 만들되 “조직”했다고 합니다. 이 단어는 매우 정확하게 번역된 단어로 영어 성경에 보면 “knit me"라고 되어 있습니다. 니트를 짜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얽어서 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땅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한국이라는 땅에 온 것도 우리 부모님을 통해 이 땅에 온 것도 결코 그냥 되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교하게 짜서 되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청년 어떤 자매는 하나님이 너무도 사랑하셔서 너무 많이 짜셔서 살이 많다고 해서 같이 웃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는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이라고 느끼는 일을 당하게 된 때일 것 같습니다. 자기만 믿고 사업에 뛰어들라고 해서 거액을 투자했지만 투자 후에는 아는 척도 하지 않을 때의 당혹감...평생 당신 한명 사랑하며 몸 바치겠다고 외치던 남편과 아내가 각각 돌아보아 주지 않을 때의 절망감...이런 것보다 세상 사는 동안 힘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모태에서 우리를 조직하신 이후 너희들이 알아서 살아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던 아담과 하와에게 조차도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릴 가죽옷을 해 입히시는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런 관심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 자손을 통해 예수를 우리에게까지 보내 주신 분이셨습니다. 주일마다 몇 주 동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향한 계획과 그가 얼마나 우리와 비슷한 믿음의 수준이었는지를 생생하게 전해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어 하나님께서 주신 천국을 경험하고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성경에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일한 댓가가 아닌 공짜로 주신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2절과 3절에서는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라고 말씀하면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며 살기 시작했는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자랑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게 하는 믿음도 하나님 편에서 출발한 것이지 우리에게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이 땅에서 살게 하신 출발도 하나님이고 죄인으로서 생을 마감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경험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이끄셨습니다. 그 안에서 한 번 주어진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사느냐가 주어질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바다의 요동침 안에서도 시작은 분명히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면서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제자들을 태우셨습니다. 이것은 배를 타고 건너는 이 일도 예수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을 아무 이유없이 죽이거나 하지 않겠다는 약속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오너라” 안에는 너희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함께 배를 타고 건너자는 말씀 안에도 그 강력한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같이 배를 탔습니다. 폭풍우가 칩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그들은 장년이 될 때까지 이 곳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던 어부였습니다. 그런 전문가인 어부들을 크게 당황케 하는 물결이 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그 때 예수님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껏 인도하셨으니 하나님께 그 책임을 넘겨 드린다고 고백하십시오. 우리의 우리 된 것은 내가 만들어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함께 하시고 계신 인생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을 확실히 믿고 기대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를 모태에서부터 니트처럼 견고하게 짜 놓으신 하나님,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오고 있다는 것에 우리의 믿음이 있습니까? 아니면 배로 물이 들어오고 폭풍이 치며 파도가 치는 그 곳에 우리의 믿음이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믿음의 출발은 어디인지를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한 말에 순종하여 따라 온 너희들의 믿음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느냐? 오늘 흔들리는 이 배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있단 말이냐? 그래서 마태, 마가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꾸짖으면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는 말씀 속에는 오늘 한 질문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를 조직하고 이끈 예수인 나에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흔들리는 폭풍에 믿음의 근거가 있는 것인가?

  적은 믿음이라고 할 때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문제는 크게 보고 하나님은 작게 볼 때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입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가기 쉬운 존재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우리는 비행기 조종사가 낙하산을 대하듯 하나님을 대하듯이 하나님을 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위기 상황에 대비해 마련해 두긴 하지만 그것을 사용해야 할 기회는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물어 보십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이 말씀안에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 담겨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교만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낮춤으로써 정복하시는 분으로서 우리가 언제나 그분보다는 다른 것을 더 좋아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 많이 좌지우지 된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붙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분께 나아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꾸짖고 책망하신 적은 아주 있었지만 우리를 경멸하신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우리의 출발이 어디에서부터 였는지, 그래서 지금 지내고 있는 결정적인 원인을 늘 물어보십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