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능력있는 삶인가?

by 이도수 posted Aug 3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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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7:1~25
얼마나 능력있는 삶인가?

범죄를 해서 잡힌 사람이 형을 살다가 죽으면 형 집행은 어떻게 될까요? 그때부터 중단되고 소멸됩니다.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죠. 안타까운 일이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로 그에 대한 모든 수사가 중지되었습니다. 남편(아내)가 죽으면 배우자는 그 범주와 의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죽은 부모나 남편이 빚을 많이 지었다고 할지라도 상속권을 포기하면 그 모든 빚으로부터 남은 유가족들은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이 죽고 나면 남아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여전히 죽은 사람에 매여 있으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죽은 사람을 기리고 추모하며 뜻을 이루는 것이야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죽은 사람 때문에 하던 일도 그만두고 그 사람만 위해서 남은 평생을 살겠다고 하면서 산 속에 들어가 칩거하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죽은 사람을 위로하고 좋은 곳으로 보내준다고 하면서 행하는 어떤 일들도 다 헛된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이제 천국에서(혹은 지옥에서) 영원한 삶을 살고 있기에 우리가 그 영혼에 대해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은 자들은 이 땅에서 내게 주어진 삶과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일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외도하는 것이고 바람피우는 죄가 되지만 죽은 후에 다른 새사람을 만나는 것은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그런 입장이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서 영적으로 우리의 옛사람은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과 새로운 신혼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1~4절).

우리는 옛사람에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새사람이 되었는데도 안타까운 것이 무엇일까요? 옛날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다시 옛사람으로 사는 것이 가장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일 것입니다. 이전에는 죄가 우리를 지배했으나 이제는 그렇게 살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배하시는 삶을 살 존재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5~6절)

죄에 지배당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아름다운 열매 맺으며 살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새사람이 된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왜 새사람이 되었는데도 죄를 생각하고 죄를 범하는 것일까요?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는 내 안에 죄악의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죄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싸움이 있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15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8~19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1~23절)

위대한 사도 바울조차도 죄와 싸우면서 처절한 씨름이 있었으며 그 씨름에서 패배하면서 겪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며 괴로운 사람이라고 탄식이 있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4절)

그렇다면 그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값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그 사망의 고통을 치루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악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이다. 나의 옛사람, 죄의 본성, 옛 성품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새사람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이 짓는 것입니다. 죄가 죄를 짓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절)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절)

그 진리를 깨달은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 왜 그렇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이며, 내 안에서 죄를 짓는 죄의 본성을 제거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지만 내가 짓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기생하고 있는 죄의 본성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옛사람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이미 죽었기에 그 죄 값을 치룰 존재는 없습니다. 그래서 죄 값을 정해서 죄 값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 존재가 이 땅에서는 존재하고 있지만 이미 값을 치루어서 죽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아직을 살고 있지만 이미를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 은혜를 기억하시고 살면 됩니다. 죄를 이길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을 누리고 만끽하면서 살면 죄가 무력해 집니다. 죄가 힘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의 삶입니까?
능력의 삶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